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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2. 15. 15:25

처음 맞이하는 학기중의 발렌타인 데이다. 한국에서는 주로 이 시기가 방학이라 못받는 이유로 방학을 탓하며 애써 날 위로 했었는데. 여기서는 빼도박도 못하게 생겼다.

한국에서는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주는 날이라고 정해져 있지만, 미국 유학생들은 딱히 남녀를 따지지 않고 뭔가 주고 받는 분위기인가 보다. 주는 것은 부담스럽고 귀찮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받는 것은 좋긴 좋은 일이지만 부담스러운 일이다. 주고받는 것보단 안주고안받는 게 훨씬 좋다는, 이런 메마른 감정과 귀차니즘.

발렌타인데이, 더 귀찮은 이유중에 하나는 나는 초콜릿보다 사탕이 더 좋다는 것이다.ㅎㅎ 대부분의 여자들이 사탕보다 초콜릿을 좋아하는 걸로 아는데, 왜 발렌타인 데이와 화이트 데이는 이렇게 반대로 되어있는지 모르겠다. 초중고 시절 초콜릿을 받으면 (별로 받은 적도 없다만) 주로 누나들이 즐거워 하며 내 초콜릿을 먹었다. 초콜릿을 별로 안좋아하는 나는 그런 누나들이 별로 밉지도 초콜릿이 아깝지도 않았다. 단걸 별로 안좋아하는 나로써는 초콜릿이 있으면 그냥 주변 사람들을 주곤 했다. 가장 최근 사례로는 - 겨울방학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내 옆자리 앉은 입술에 피어싱한 여자애가 기내식 디저트로 나온 초콜릿이 다 녹아빠졌다고 스튜어디스한테 새로 달라길래 나 초콜릿 안먹으니까 먹을래? 하면서 줬던 기억이 있다.

이번 발렌타인 데이에 과연 누군가에게 초콜릿을 받을 수 있을까 - 당연히 아니지 라고 생각하고 있던 나에게, 같은 동아리의 한 여자애가 초콜릿을 주었다. 물론ㅎ, 동아리 멤버 전체에 돌리는 거를 받은 거다. 고마워는 했지만, 음 저걸 먹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남 주기도 그렇고 어쩐다냐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기분이 쌉싸름해 졌다.
내가 초콜릿 싫어하는 걸 알고서, 별 말 없이 알아서 발렌타인 데이에 나에게 사탕을 선물해주는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이 사탕보다 초콜릿을 더 좋아하는 것을 알기에, 내가 화이트 데이에 초콜릿을 선물해 줄 사람,
혹은 내가 초콜릿 싫어하는 걸 아니까, 발렌타인 데이라고 나에게 초콜릿을 사주고서는
너 근데 초콜릿 싫어하지? 내가 먹을께~ ㅋㅋ
하고 마냥 웃으며 내 앞에서 그 초콜릿을 맛있게 먹는 사람.

서로 뭔가를 설명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저럴 사람.
언제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갑자기 눈앞이 아득하다.

2008. 2. 14. 05:40

여름방학동안 어떻게 뭔가 할 수 없을까 싶어, 여기저기 연구 참여 프로그램 같은것을 뒤져서 신청중이다. 대부분의 프로그램들이 미국 시민권자 혹은 영주권자들만 지원가능한지라 매우 절망했었는데, 그래도 뒤지니까 국제학생도 가능한 프로그램들이 있더라. 좀 늦은 듯 싶었어도 열심히 에세이 쓰고 그리고 지난학기 수학 교수에게 추천서를 부탁했다.

토요일밤, 늦어서 죄송하다고, 거듭 표현하며 부탁했었는데, 역시 친절하게도 부탁하는건 다 들어준다. 미국 교수들의 특징. 수요일 추천서 마감이라고 해서 만나기로 했는데, 각자의 스케쥴로 인해 결국 수요일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 나는 당연히 수요일쯤 내가 보낸 서류들을 바탕으로 대충 써 놨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오늘 교수와 만나서는 무려 한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내가 어떤 연구 경험이 있고 어떤 상을 받았고 그게 어떤 내용이었고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그냥 추천서를 한장 써준다, 이런 개념이 아니라 뭔가 나에 대해 그리고 나의 활동에 대해 더 자세히 물어보고 파낸 후 최선을 다해 추천서를 써주겠다는 자세였다.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그런 교수가 너무 고마웠다. 게다가, 자신은 사실 교수가 아니라 Senior Lecturer에 불과하다며 사실 추천서라는게 명망있는 교수가 써주면 더 효과가 크다고, 아직 난 1학년이니까 그러기 힘든거 당연하지만 앞으로 잘 해서 내년 여름이나 이럴때는 그런 물리학과 교수한테 받으면 더 좋을꺼라고 말하더라. 나는 한수 낮은 사람이고, 최선을 다해주겠지만, 그래도 다음엔 더 좋은 사람을 만나라는 말. 이거 쉽게 할 수 있는 말일까?

한국 대학생활을 내가 제대로 겪어본 건 아니지만, 한국 교수들도 추천서를 부탁받았을 때 과연 그렇게 할까 궁금해진다. 대학은 고등학교와 조금 다를런지도, 또 교수에 따라 천차만별이겠지만, 왠지 안그럴 것 같다. 사실 한국에선 대뜸 1학년이 추천서 써달라고 부탁하는 것조차 어려운 권위적 분위기인데.

이런 경험들을 통해서, 요즘 유학을 온 것이 좋은 선택이었단 생각이 하나 둘 씩 늘어나고 있다.


첨언 : 이 교수도 나에게 영어 에세이의 관사 문제에 대해 지적했다. 연구 참여 프로그램의 특성상 영어를 크게 신경쓰지는 않겠지만 앞으로 좀 수정을 받던지 하라는 교수의 말. 이놈의 영어, 언젠간 내게 결정적인 발목을 잡을 그날이 올것만 같다. - 그 전에 발목 안잡힐 실력을 만들어야지... ㅠㅠ

2008. 2. 10. 12:18

토요일 점심때의 기숙사 식당은 특히 붐빈다. 수업이 없는 관계로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 식당으로 향하는 데다가 주말인지라 아침 늦게 일어나 첫 끼니로 먹는 사람들까지 겹치기 때문에, 12시 - 1시 사이에는 바글바글하다. 들어갈때마다 늘 중얼거려지는게 - 아 저기에 핵 하나 떨어뜨려서 깨끗하게 정리했음 좋겠다... 정도니까. ㅎㅎ

이렇게나 사람이 많을때에는 늘 먹던 오믈렛을 먹는 것이 조금 망설여 진다. 오믈렛은 조그만한 쪽지에다가 원하는 재료를 적어주면 그것을 바탕으로 직원이 만들어주는데, 주문이 많이 밀려 있을 경우 그 조그만 쪽지를 나눠주지 않고 밀린 주문이 어느정도 해결되야 다음 쪽지를 나눠주게 된다. 그래서 주말 점심때는 오믈렛 주문을 기다리는 줄이 워낙 길다. 줄서기가 싫어 식당을 한바뀌 쭉 둘러 봤는데, 오늘따라 유난히도 먹을게 없어서 한숨 푹 쉬며 결국 오믈렛 줄에 섰다. 먹을건 이거 밖에 없구나.

줄에 서 있는 사이 어떤 아주머니와 세 자녀가 보였다. 기숙사 거주 교수의 가족일런지, 그냥 어쩌다 오게된 관광객인지 모르겠지만, 이리저리 톡톡 튀는 세 아들, 딸 들을 조절한다고 이렇게 저렇게 고생하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그래도 식당 사정을 어느정도 아신 아주머니였는지, 갑자기 줄 맨 뒤에 있던 내게 다가와 [지금 오믈렛 종이를 기다리는 중인건가요?]라고 물었다. 웃으며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아들래미 하나가 먹고 싶어 했는지 내 뒤에 줄을 세운다. [줄 서있다가 네 차례 되면 주문하렴].

마침 기숙사 같은 층에 사는 친구 하나가 내 뒤에 줄을 섰다. 낯설어서인지, 제대로 줄에 서 있지 못하는 그 아들 녀석을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내 뒤에 끌어당겨 세웠다. [어, 얘 줄 선 거였어?] [응 ㅋㅋ] 어라, 근데 이녀석 뭔가 나를 꺼려하는 눈치다. 음, 아주 약간, 정말 아주 약간 정도, 내가 아시아인이라서 이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식당 직원이 몇장의 오믈렛 쪽지를 더 갖다줬다. 내 앞의 사람들이 죽죽 지나가고, 마침내 내 차례가 되었을때, 쪽지는 단 한장 남아 있었다. 이런. 꼬마에게 양보하고 내가 좀 더 기다려야 되는 건가. 꼬마의 엄마는 어딘가 보이지 않았다.

[자 꼬마야 이게 주문하는 종이거든? 여기다가 네가 오믈렛 속에 넣고 싶은 것들을 적어야 해요. 주문대가 너한텐 너무 높으니까, 내가 적어줄께ㅎㅎ, 재료 종류에는 양파, 햄, 베이컨, 피망, 치즈, 토마토, 정도가 있는데 뭐 먹고 싶니?]

라는 아주 아름다운 그림이 머리 속에 펼쳐졌다. 그러나 순간, 겁이 났다.

[이녀석, 날 조금 꺼려하던데. 음. 저 말들을 어떻게 꼬마한테 알아듣게 영어로 표현하지? 내 발음을 알아 듣기는 할까? 괜히 문제만 만드는거 아닌가, 아 그렇다고 한장 남은거 꼬마가 내 뒤에 서있는데 그냥 달랑 내가 쓰고 가기도 뭐하고. 뭐지. 아놔. 한국같았으면 이런 걱정 안하고 꼬마에게 아주 친절한 형이 되어줄텐데]

두 그림이 서로 좀 갈팡질팡하다가, 에라이, 그냥 내가 그 종이에 주문내용 적고 자리를 떠났다. 찝찝한 기분에 뒤를 돌아봤더니, 마침 꼬마 어머니가 달려와서 식당 직원과 이리저리 얘기하고 있더라. 다행이었다..


핑계 같겠지만, 한국같았으면 정말 저 아름다운 그림을 실현시켰을 텐데. 나 그런거 잘 하는거 모두들 잘 알잖아요ㅎㅎ [영어] 속에서는 나만의 매력과 장점을 자꾸만 잃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경우가 그런 경우다. 뭔가 씁쓸하고, 쩝, 하고 혀를 한번 차게 되는. 사실 한학기 좀 넘게 미국에 있으면서 좀더 많이 영어로 말하게 되었지만, 직접적으로 영어가 늘었다기 보다는 그저 틀리는거 이상하게 말하는거 겁내지 않고 뻔뻔해진게 주요한 발전이었다. 음, 그래도 아직 많이 겁나나 보다. 100%는 영원이 불가능하다손 인정하더라도, 한 95%정도까지만이라도 영어가 겁나지 않는 시기는 언제쯤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