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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 해당되는 글 3건
2009. 8. 22. 17:00
07/18 하이파 Haifa
어떤 면에선 상당히 부산같았던 도시. 해변으로부터 근접한 산 정상까지 걸쳐서 도시가 펼쳐지는 덕에 도시의 가장 높은 곳(즉, 산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경치는 압권이었다. 바하이 정원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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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하이 정원과 하이파 전경



08/19 예루살렘
예수님이 십자가를 끌고 간 길 Via Dolorosa를 따라 걸었다. 예수의 죽음 300년 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인정하자 그의 어머니인 헬레나는 이스라엘을 들러 예수와 관련된 각종 지역들을 찾아내서 성당을 지었는데, 이스라엘 내의 상당수의 유서깊은 성당은 그 시기에 처음 지어진 것들이 많다. 채찍으로 걸음을 재촉당한 곳, 쓰러지면서 벽에 손을 대었던 곳, 그리고 결국 십자가에 못박힌 골고타 언덕까지 크게는 성당이 작게는 예배당이 자리잡고 있었다. 마지막 골고타 언덕엔 성묘교회 Church of the Holy Sepulchre 를 만들었는데, 반동의식이 강한 나로써는 저게 사실은 예수님 무덤이 아니라 딴사람 무덤이면 진짜 대박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산) 근데, 300년이나 지난 후에 찾아낸 건데 그 시절에 무슨 방사선 동위원소를 재봣을 것도 아니고 진짜인지 아닌지 어떻게 확신하겠나..?

재밌는 점은 기독교 내의 각종 종파(카톨릭, 그리스 정교, 시리아, 아르메니아, 등등등)가 성묘교회 내부의 영역을 나누어 소유하고 있고, 분쟁의 소지 덕분에 아침 저녁으로 대문을 걸어 잠구면서 관리하는 것은 이슬람교도에게 맡긴다고 한다. 그 무덤이 실제 예수님 무덤이라고 한들, 저 사실을 알면 아마 예수님이 땅을 치며 안타까워 하실거다.

덧붙여 당연한거기도 하지만 웃기기도 한점은 콘스탄티누스와 그의 엄마 헬레나 모두 카톨릭의 성인이라는 점이다. 콘스탄티누스야 유명한 카톨릭 철학자라고 쳐도, (아주 비꼬아서 얘기하자면) 황제의 엄마라는 본인의 정치적 위치를 이용해 교회 몇개 지은 걸로도 성인이 되는 거 보면 조금 우습기도 하다. 물론 진짜 성인스러우셨을 수도 있다 ^^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라는 성 안나 St Anne을 위해 만든 성당에서는 엉겹결에 한 신부님과 조촐한 대화를 나누었다. 탄자니아에서 20년간 포교활동을 하시다가 이제 십년째 예루살렘에 머물고 계신다던데, 성 안나 성당의 소리울림이 유명하다며 자꾸 노래를 불러보라고 재촉하시는 바람에 머뭇머뭇 하다 결국 애국가 한소절 부르고 말았다...



08/20-21 요르단 페트라 Petra
페트라는 정말 많이 망설인 끝에 방문했다. 가는 길도 험하고 멀 뿐더러 서양 문화와 매스미디어가 쇄뇌시켜놓은 이 이슬람 국가들에 대한 막연한 공포 덕분에 꾸물꾸물 거리다가, - 언제 내가 여기 부근을 다시 오겠어, 좋아 가는거야 - 하고 큰맘먹고 길을 나섰다.

갔다온 지금은 당연히 가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뿐이다. 당연히 그닥 위험할 것도 없었고 (택시기사한테 덤탱이좀 씌이긴 했지만..) 페트라의 경관은 정말 압도적이었다.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 편에서 등장한 덕에 유명해졌고, 몇 년 전에는 신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히기도 한 페트라는, 기원전 6세기경 나바테이아 인들이 사막 한가운데의 바위 산들을 깎아 만든 유적이다. 주변의 황폐한 환경적 조건에 그 유적의 거대함이 더해지면서 고대인에 대한 경외심이 절로 피어나는 곳이었다. 한 달 전 쯤 예루살렘에서 헤제키아의 동굴을 보고 고대인들의 위대함을 생각했던 것이 나바테이아 인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유적은 압도적이었다. 14세기경 잊혀졌다가 19세기 경 스위스 탐험가에 의해 재발견 되었다는데, 그렇게 처음 재발견한 그는 페트라를 보고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호스텔에서 만난 Will이라는 영국 친구와 함께 돌아다니면서 끝도 없이 주절주절 얘기도 많이했다. 캄보디아에서 5년간 기자 생활을 했었다는데, 특히 그 곳에서 만난 북한 사람들에 대한 얘기가 인상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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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스라엘에서 했던 각종 생각들.

하나. 셰룻 sherut
먼저, 이스라엘은 금토가 휴일이고 일월화수목이 주중이다. 금요일 해가 지고 나서 부터 토요일 해가 지고 난 얼마 후까지가 안식일 Shabbat 인데 중요한점은 이 동안은 버스, 기차와 같은 모든 대중교통도 멈춘다는 점이다.

그러나 물론 최후의 수단이 남아 있는데, 바로 셰룻 sherut 이라고 불리는 (주로 10인승) 소형 버스다. 대도시 내부나 혹은 주요 도시 사이를 매일 24시간 운행하는데, 정류장에서 손님을 기다리다 10명이 꽉 차면 출발하는 방식이다. 덕분에 대중교통이 끊긴 늦은 밤이나 안식일때에는 아주 유용하게 사용하게 된다.

꽤나 괜찮은 시스템 같아보여서 뭔가 수입하고 싶었다. ^^ 다른덴 몰라도 버스와 지하철이 끊긴 새벽에 강남역 출발 - 각 수도권 도시 도착으로 운행하면 수요도 충분하고 경제성 있지 않을까. ㅎㅎ


둘. 유대인 학생 캠프
각종 관광 도중에 중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단체 관광객을 많이 만났다. 알고봤더니, 미국/유럽의 유대인 학생들이 캠프에 참가한 것이었다. 수많은 재단과 복지가들이 있어 무료로(!) 학생들의 이스라엘 캠프를 지원하고, 알고봤더니 같이 여름 인턴을 하는 친구들 중에도 그런 기회를 통해 한두번씩은 적어도 이스라엘의 명소들을 다 둘러봤더라. 감탄이 나올 뿐이었다. 이런게 진정 자국의 문화와 역사를 아끼고 지켜나가는 것인데, 미래엔 미국의 한인 학생들에게도 이렇게 한국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까.


셋. 종교 - 국가/민족주의
10주가 넘게 머무르고 지켜보면서, 유대교가 종교라기보다는 국가주의 혹은 민족주의에 더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는 종교와 애국심이 너무나 구분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내 이런 얘기에 한 친구는 - 그래도 국가는 치안과 같은 서비스를 국민에게 제공하고 그 덕에 애국심을 갖게 되는 것 아니냐 - 는 얘기를 했는데, 이상적으로야 맞는 말이긴 하지만 솔직히 국가가 내게 어떤 직접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리고 그런 현실적 설명만으로는 괜시리 가슴속부터 올라오는 민족애 따위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것 같다. 이른바 '나와 좀 더 가까운' 사람들을 아끼는 감정이 민족주의라면, 생각해보면 그 가까움이라는 것의 기준도 정말 애매하고 비논리적일 뿐이다. 서양인들의 민족주의가 약한건 그 대신 그들에게 기독교가 있어서였기 때문이고, 상대적으로 종교의식이 약한 우리 아시아인들은 그래서 민족의식이 강한 걸까. 다분히 민족주의가 강한 편에 속하는 나로써는 이런 일련의 생각끝에, 원래 가지고 있던 종교인들에 대한 내 약간의 거부감을 돌이켜 보게 되었다.


넷. 여행
지난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의 겨울에 이어 이번 여름을 통해 다시금 생각한건, 혼자거나 동성 친구와 여행을 다닐때면 자잘한 돌 몇개 남은 유적이나 미술관을 찾을게 아니라, 거대한 자연이나 놀라운 고대유적 따위를 쫓아다녀야 한다는 점이다. 그 편이 여행이 훨씬 즐겁고 또 많이 남는다. 로맨틱함은 여자친구와 만끽하고, 친구랑은 뻘뻘 땀흘리며 하이킹한 끝에 눈앞에 펼쳐지는 웅장한 대자연, 놀라운 고대문명을 만나도록. 그런점에서 다음 여행으로는 차타고 오스트레일리아를 한바퀴 돈다거나, 중남미의 마야, 잉카 유적지를 답사하고 싶어졌다. 그랜드 캐니언이야 그래도 미국 안인데 언젠가는 가겠지 ㅎㅎ


다섯. 이미 주어진 것들에 대한 감사함.
예루살렘 밑에서부터 홍해에 접한 휴양도시 에일랏을 지나 요르단 국경을 넘고 페트라에 가기까지, 대략 대여섯시간 동안 창 밖에는 작렬하는 태양과 뜨거운 바람, 그리고 끝없는 사막 뿐이었다. 이 황폐한 땅에서 수천년간 인간이 살아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경외감이 느껴졌다. 덧붙여 이런 환경이니까 그렇게 수많은 성인과 종교가 발생했겠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들이 본 모든 것들이 환상이라고 말하고 싶은건 아니지만, 상상해보라 - 그 사막을 몇시간씩 땀을 흘리며 걷다보면, 바위에서 아른아른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조차도 영적으로 느껴지지 않을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아마 초등학교때부터 우리나라는 자원이 없는 땅이라서 열심히 공부해야 된다는 얘기에 익숙할 것이다. 기름나는 저 아랍 국가들은 얼마나 축복받았는가에 대해 많이들 한탄들 많이 한다. 어휴, 그나마 기름이라도 나면 다행이긴 한데, 난 차라리 기름 안나도 사계절 뚜렷하고 어딜가나 푸른색을 만날 수 있는 땅에 살련다. 그 황폐한 환경에서라면 내 마음도 따라서 황폐해질것만 같다. (그런데도 과할만큼 친절한 아랍인들이 놀라울 뿐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만난 아이들을 보면 내게 주어진 것들에 대해 감사할 수 밖에 없다. 온 몸에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제대로 식수를 공급받지도 못하면서 페트라 유적 내에서 먹고 자고 살아가는 아이들을 보면, 아둥바둥 작은 것들에 속상해하고 서로를 상처주고 싸우고 했던 모습들이 미안해진다. 그 속에서도 그 아이들은 너무나도 밝고 친절하기만 한데.





정리.
이제 마무리 하고 한국이다. 솔직히 말하면 각종 미국 경험에 지난 겨울 이번 여름까지 아무리 여행이 좋다지만 너무 잦은 덕에 조금씩 질려가는 느낌도 없지 않았는데, 2년 후면 다시금 고파지겠지..? ㅎㅎ

아, 그래도 이 여름의 주는 연구활동이었는데, 놀러다닌 얘기만 한 것 같아 연구실 사진도 올려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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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7. 17. 03:49
이스라엘에서 둘러본 곳들 - 1


06/18-19 텔아비브 Tel Aviv
4000년 역사의 항구라던 Jaffa에서는 진짜 오래된 건물이 아니라 오래된 것처럼 보이는 새 건물만 있길래 조금 실망했다. 텔아비브의 집들은 모두 하얀 색이었는데, 더운 나라라면 당연한 하얀 집들을 보고 - 그리스 같다.. - 고 생각하는 날 발견했다. 역시나 첫인상은 참 중요하다.

지중해로 떨어지는 석양을 봤다. 간간히 파도자락에 흰 달빛이 비추기도 했지만, 밤 바다는 정말 불빛 하나 없이 어두웠다. 이제 육지 내에서는 어느 곳이듯 아무런 빛이 보이지 않는 경우를 찾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텐데, 그런 생각때문이었을까, 괜시리 마음이 시원하게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치만 그런 반가운 마음 한 켠으론, 무척 무서웠다. 원양어업선 위의 선원들은 매일 밤 아무 불빛없는 사방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06/29 마사다 Masada, 사해 Dead Sea, Ein Prat - 여름 인턴 단체 여행.
1세기경 유대인들이 로마인들에게 마지막으로 저항했던 장소 중 하나. 끝까지 저항하다가 패배가 확실해지자 모두들 자결하는 길을 택했다고 한다. 그 얘기에 당연스레 일본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로, 끝까지 저항하던 그 사람들의 명칭에서 질럿Zealot이란 말이 유래했다.) 동편엔 사해가 보였고 서편엔 험준한 바위사막이 있었다. 유적보다도 주변 경관이 압도적이었고, 여기가 이런데 그랜드 캐니언 가면 정말 기절하겠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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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다 꼭대기에서 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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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해에서. 유명한 사진처럼 책읽는 포즈를 잡고 싶었는데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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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n Prat에서의 하이킹을 마치고 규섭이와 한 장.



07/03 아코 Akko
혼자 찾아갔던 도시. 기원전 19세기 이집트 문헌에서부터 등장한다는 아코는 가장 다사다난 했던 도시 중 하나다. 헤라클레스가 부상 회복을 위해 쉬어갔다는 전설도 있고, 알렉산더 대왕도 지나갔었다고 한다. 십자군 시절에는 유럽 각지에서 오는 십자군들과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 전에 모이던 항구였고, 살라딘에게 잠시 빼앗기기도 했던 도시다. 이후 오스만 제국의 밑에 있다가 근대에 이르게 됬다.

아코를 갔다 온 며칠 후 네이버 오늘의 세계 인물의 주인공으로 사자왕 리처드가 등장한 것을 봤다. 리처드가 살라딘과 이 아코에서 했던 전투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 등장했다. 묘한 인연/타이밍이 참 재밌었다.

좁은 길들을 이곳 저곳 뒤지고 다니면서 십자군들이 지었던 건물의 흔적과 모스크 등을 둘러보았다. 대체 종교가 뭐길래 이 거대한 것들을 짓고 부수고 다시 짓고 다시 부수고 또 짓고 또 부수고 했을까.




07/14 예루살렘 - 여름 인턴 단체 관광.
예루살렘 근교에는 Yad Vashem이라는 홀로코스트 기념관이 있다. 반유대주의의 기원에 대한 간략한 설명으로부터 시작해서, 히틀러의 등장부터 2차대전의 끝까지는 그들의 만행과 유대인들의 안타까운 역사에 대한 아주 상세한 설명/인터뷰/자료 들이 이어졌다. 2차대전만 아니었어도 독일이 지금의 미국 역할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안타까운 생각이 다시 한 번 들었고, 그 비인간적인 학살의 방식을 보며 인간은 참 어이없게 신기한 존재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의 역사도 역사이니만큼 어느정도는 감정이입을 하고 관람을 할 수 있었는데, 이렇게 잘 마련된 기념관이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갖는 의미를 생각하다 보니 우리나라의 독립기념관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러곤 참 문제라고 생각했다. 정작 이 먼 곳에 홀로코스트 기념관에는 와봐도 우리나라 독립기념관은 가 본적이 있는지 조차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참 부끄러운 일이다... 덧붙여 예루살렘 관광에서 여름 인턴들을 이곳으로 데려왔다는 사실이 참 정치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다비드 시 city of David에선 Hezekiah의 터널이란 곳이 있었다. 3000년 전의 사람들이 400미터 가량의 터널을 뚫어 예루살렘으로 물을 공급하는 터널을 만들었는데, 그 터널을 관광객들이 따라 걸어갈 수 있었다. 단순히 끌과 망치로만 그 터널을 만들었을텐데, 역시 고대인들은 위대하다는 생각을 했다... (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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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vien, Nathanel과 함께 통곡의 벽 앞에서. 유대교 성지에선 여성들은 어깨를 가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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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시대 유적 중 한곳에서 여름 인턴 단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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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 시에서 올리브 산 Mt. Olive을 배경으로.

연구소에서 마련해준 단체 여행인 만큼 유대인과 관련된 부분들만 둘러보게 되었다. 기독교와 이슬람 관련 장소들은 개인적으로 다시 찾아가 볼 계획. 예루살렘까지 가서 예수님 무덤이랑 십자가를 안보고 돌아올 순 없잖아?ㅎㅎ
2009. 6. 10. 01:51
5/18-6/7
이번 한국행에선 계속 집에 머무르며 한번만 2박3일로 외출했다. 지난번들에 비하면 훨씬 조용히 보낸셈이다. 어학병 시험을 앞두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기엔 눈치가 보여서 집에 있었는데 ㅎㅎ 그렇다고 집에서 제대로 공부한 것은 당연 아니었다.


하나. 공항
일본을 경유하여 한국으로 돌아오는 티켓이었는데, 신종 인플루엔자 검역으로 인해 일본에서 환승한 비행기의 이륙이 두시간 정도 지체되었고, 덕분에 집으로 가는 마지막 버스 시간을 넘기고서야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서울 어디 아는 집으로 가자니 짐도 너무 많고 그래서, 그냥 공항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 첫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시차 덕분에 크게 졸린 건 없었고, 덕분에 책 좀 읽다가, 햄버거 하나 먹고, 인터넷 좀 하다가, 티비 좀 보다가 하다보니 어느덧 해가 떴다. 기다리면서 지난 겨울 로마와 암스테르담 공항에서 하루씩 노숙한 기억이 떠올랐다. 한국에서 나름 어릴 적부터 이곳저곳을 다닌 덕인지, 가끔 영상매체를 통해서 기차역과 버스터미널을 접하면 묘한 그리움과 아련함에 휩싸이곤 했었다 - 역과 터미널이 '내 공간'인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이제까지의 각종 공항에서의 경험에 이번 밤샘이 더해지면서 이제 공항도 '내 공간' 안으로 들어오는구나.. 싶었다.


둘. 소소한 일상의 행복
거의 매일, 저녁 식사 후 어머니와 손을 꼭 붙잡은 채 아파트 뒤를 산책했다.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며 웃고, 토닥토닥 소소한 말다툼을 하고, 산책로 위의 수많은 아주머니들께 인사를 드렸다. 아파트 뒤의 논에는 이미 모내기가 끝나 있었는데, 그게 자꾸만 눈에 들어오더라 -  해가 덜 진 초저녁에 산책할때면 조금씩 삐뚤삐뚤하게 심어진 모를 보며 그 특유의 옅은 초록색이 참 이쁘다고 생각했고, 밤엔 논을 거울삼아 비치는 아파트의 불빛들, 한국 특유의 요란한 상가 간판들, 그리고 달빛이 반짝거리는 모습을 눈에 담으려고 애썼다. 개굴개굴 개구리 소리도 귀에 찐했다. 산책 중간중간 어머니와의 대화가 끊길때면, 내가 얼마나 많은 일상의 소소함을 놓치고 살아가는지를 생각했다. 행복이란게 별게 아닌데.

그렇게 놓치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이어져 한국에 있지 않음으로써 내가 잃어버린 것들도 하나둘 떠올랐다. 아마 한국에서 대학을 다녔다면, 한두개의 동아리 안에선 회장 정도쯤 하면서 온갖 엠티와 술자리를 주선했을테이고, 계절마다 찾아오는 각종 영화제에 자원봉사를 신청했을 것이다. 이십대 초반이 지나기 전에 맘에 맞는 친구들과 지리산 종주도 해보고 싶고, 자전거에 텐트하나 얹이고 동해안 일주도 해 보고 싶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 남는건 그렇게 쌓아 놓은 추억들 - 산장속에서의 하룻밤, 여름임에도 냉기가 쩍쩍 올라오는 텐트바닥, 그리고 그러는 동안 내 눈에 담긴 우리나라 - 일텐데, 이런 것들을 놓친 만큼 혹은 그 이상을 미국에서 얻어내고 있을까.

그렇지만 다시금 생각했다. 이제는 머리로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지 않는가. 밖에 있으면 환상이었던 그 모든 것들이 안으로 들어가서보면 어느덧 일상이 되어버린다는 걸. 그렇게 안밖이 뒤바뀌면 어느덧 이젠 안에서 밖을 그리워하고, 일상이었던 것들이 환상이 되어버린다. 이것도 그런 걸꺼다. 이제는 재현 불가능해진 과거의 경험들에 대해선 감사해하고, 내 마음에서 그만 놓아야할 것들에 대해선 너무 안타까워 하지 말아야 겠지. 아 물론, 아직도 가능한 것들은 어떻게든 누려내고 말꺼다 ㅎㅎ


셋. 어학병
미국에서 머무르다 바로 인턴하러 갈 수도 있었는데, 그래도 굳이 한국을 들린 주된 이유는 사실 어학병 시험때문이었다. 지난 6월 4일이 시험 날이었고, 시험 전까진 집에 머무르면서 공부하는 척을 했다. 시험에선 오전에 영한 한영 번역을 하고, 오후에 영한 한영 통역을 해야한다. 앞의 세개는 그런데로 괜찮았지만 마지막 한영 통역에서 거의 한마디도 못하고 나와버렸다. 영어로 못 옮기겠었던건 아니었는데, 문제는 단 일초전에 한국말로 들었던 그 내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겠는 거였다.... 덕분에 시험은 떨어질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이고 나의 군대행은 계획에서 벌써 한칸 어긋나 버리고 말았다.. 에고.


넷. 내 오랜 친구들
목요일 아침 9시였던 어학병 시험에 구미에서 곧바로 갈 차편이 없어 전날 천안의 작은누나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도착한 천안에서 누나들과 시간을 보내는 사이, 먼저 어학병으로 입대한 정모로부터 전화가 왔다. 삼십분 남짓 통화했는데, 녀석도, 나도, 어찌나 여전한지. 어학병 시험과 군대 생활, 그리고 여자에 관한 시덥잖은 얘기들로 삼십분을 꼬박 채우면서 몇번이나 낄낄 거리고 웃었는데 - 참 좋았다.

시험이 끝나고 서울에서 만난 친구와도 한참을 얘기를 나눴는데, 내가 얼마나 말이 많았는지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왠지 그 친구가 흉봤을 것만 같다. ㅎㅎ 그리고 그날 밤 내려간 대전에선 재형, 강섭, 수연이를 만나 각자의 요즘의 삶과 고등학교 때 있었던 이야기들로 밤을 꼬박 새버렸다. 나 덕에, 그리고 각자의 대학에서의 갈라진 삶 덕에 이젠 삶의 공통분모가 꽤나 많이 사라졌다지만, 그들도 나도 참 여전했다. 맘 푹 놓고 마신 덕인지 맥주 서너잔에 벌써 취기가 올라왔고 정신없이 서로 놀리고 갈구고 욕하고 웃었다. 그 편안함.


그리고 다시 출국해서 지금은 이스라엘에 있다. 어떻게 운이 잘 닿아 이번 방학에는 이스라엘의 와이즈만 연구소에서 인턴을 하게 됬다. 하는 일은 초전도체와 관련된 건데, 일도 일이지만 이스라엘에서만 겪을 수 있는 것들을 많이 겪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어학병 시험을 공부하는 척 하면서 봤던 각종 영화와 드라마들.

와니와 준하
티비에서 결혼한 김희선이 나오길래, 몇번 뒤지다가 못찾겠음을 반복한 끝에 여전히 보지 못한, 김희선이 가장 아름다웠다던 영화 와니와 준하를 찾아봤다. 영화는 그냥 썩 괜찮은 정도였다.

미녀는 괴로워
와니와 준하의 주진모를 보고 이 영화도 보지 않았음이 생각이 나서 찾아보았다. 극중 주진모의 대사가 참 맘에 들었다. - 열심히 하는 것보다 잘 하는 것이 중요하지.

시티홀
극 중 차승원이 맡은 역할에 끌렸다. 사시와 행시를 동시에 패스한 천재이고, 매우 현실적이고 야비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만, 숨겨진 아픔이 있는 그런 캐릭터? ㅎㅎ 이젠 좀 정형화된 뻔함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런걸 내가 좋아하는 건 어쩔 수 없는 거고 - 거기에 파리의 연인을 썼던 김은숙 작가의 작품이라는 점까지 더해져 결국 일부러 찾아보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재미있는데, 김은숙 작가라는 사실이 초반부의 재미를 보장하는 건 사실이지만 덕분에 후반부의 늘어짐이 걱정스럽기도 하다....

박수칠 때 떠나라
시 티홀을 보면서 차승원의 길이, 몸매, 수트빨에 반해버렸고, 그래서 그의 영화를 찾아보게 되었다. 괜찮은 영화였다는 입소문이 기억나서 박수칠 때 떠나라를 가장 먼저 찾아보았는데, 이 영화도 그냥 그럭저럭이었다. 내가 장진식 유머를 좋아하지 않는 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고, 틈틈히 그런 유머가 영화의 흐름을 끊었던 것만 아니었다면 꽤나 괜찮은 스릴러물 이었을 것 같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마찬가지로 찾아본 차승원의 영화.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럭저럭한 장르물이었다.

그저 바라보다가
우 연히 주말 재방송으로 9화와 10화를 보고는 재미있길래 앞 화도 다 찾아보았다. ㅡ.ㅡ;; 평범한 우체국 직원(황정민)과 우리나라 최고의 톱스타(김아중)가 어떤 계기로 위장결혼한 끝에 결국은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인데, 둘의 로맨스의 전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나도 별 수 없이 황정민이 나고 김아중이 김태희 혹은 송혜교라는 환상을 품으며 감정이입을 하게 되었다. (^^) 덕분에 드라마가 매우 재미있다. 그리고 미녀는 괴로워와 이 드라마를 통해서, '몸매만 좋지 얼굴은 별로잖아'였던 김아중에 대한 평가가 '몸매는 정말 최고고 얼굴도 저만하면 충분히 이쁘지!'로 바뀌었다.

너무 놀라지 마라
때마침 구미에서 개최된 전국연극제의 개막작으로, 어머니와 함께 관극했다. 극중에선 가난과 정신이상과 패륜에 의한 놀랄 일들이 계속해서 튀어나오는데, 주인공들은 연극의 제목처럼 그걸 전혀 놀라지 않고 받아들인다. 장영남의 넘치는 에너지가 돋보이는 연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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