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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에 해당되는 글 2건
2007. 5. 10.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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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 밀란 쿤데라, 방미경 옮김, 민음사

밀란 쿤데라의 처녀작. 자유가 억압되고 모든 것이 감시 받던 그 시대의 체코에서, 마르케타에게 그저 눈길이나 끌고 싶어서 던졌던 루드빅의 농담 적힌 엽서는, 루드빅의 인생을 걷잡을 수 없는 실패로 치닫게 만드는데....


하나. 서술기법.
일단 인상깊었던 건 역시나 서술 방식이다. 책은 루드빅, 야로슬라브, 헬레나, 코스트카 라는 네 화자가 번갈아 가며 1인칭의 서술을 보인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하나의 독특한 묘미, 혹은 특성을 가지게 되는데, 말하자면 야로슬라브가 루드빅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그 시점 이후는 다시 루드빅이 야로슬라브에 대해 이야기하는 식이다. 동일 사건에 대해 두 화자의 다른 이야기를 듣고, 또 어떤 화자의 감쳐졌던 이야기를 다른 화자를 통해 듣는 경우가 곳곳에 보이면서 새로운 느낌의 독서를 가져다 준다. 이러한 느낌은 특히 3부에서 루드빅의 시점에서의 루드빅-루치에 관계가 전부인줄 알다가 6부의 코스트카로부터 루치에 시점에서의 루드빅-루치에 관계에 대해 전해 들을 때에 극대화를 이룬다. 또 헬레나, 루드빅, 야로슬라브의 시점이 계속해서 뒤섞이는 7부에서도 서술 기법상의 묘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3인칭 시점은 가질 수 없는 1인칭 시점만의 매력은 살리면서도, 1인칭 시점이 필연적으로 가지는 서술상의 한계를 교묘하게 극복해내는 방법이 아니었을까. 

덧붙여 이러한 서술 기법은, [이해]라는 동사의 주어-목적어가 능동-수동의 관계라는 점에서 필연적으로 귀결되는, 결국 한 개인이 [이해]하는 타인, 그리고 이 세계는 파편화됬을 수 밖에 없다는 책의 메세지와 묘하게 겹치면서 독자에게 더 큰 울림을 만들어낸다.


둘. 공산주의.
앞서 읽었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도 느꼈던 바지만, 밀란 쿤데라는 공산주의 시절의 억압된 체코사회를 그저 책의 무대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소재 중 하나로써, 책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하나의 장치로써 사용한다. 특히 [농담]에서는 루드빅이 가볍게 던지 농담이 모든 말과 글이 검열되던 사회 속에서 어떻게 받아지는지, 그로 인해 루드빅의 인생과 가치, 믿음이 얼마나 처참하게 부숴지는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밀란 쿤데라의 책 속의 [공산주의]는 체코 국민, 혹은 공산주의 치하의 삶을 살았었던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범세계적 관심과 집중을 불러냈다. 직접 겪은 이가 아니면 제대로 이해, 혹은 동감하지 못할 부분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책의 배경은, 평단과 독자로부터 한단계 높은 찬사를 받아내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게 되었던 것이 틀림없다. 결론은, 아주 잔인한 표현이겠지만, 그런 가슴아픈 역사가 오늘날 체코 문학을 살찌우는 하나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도 그런 유사한 과거가 있지는 않은지. 조금 멀게는 일제시대도 있었고, 좀 더 가깝게는 3,4,5공으로 이어지는 독재시절이 있었는데, 우리의 이러한 배경은 민족적 공감을 초월하여 범세계적 환호와 찬사를 받아내는 문학을 왜 아직 만들지 못하는 것일까. 그저 아시아에 속한 나라라서? 작가들의 역량이 부족해서? 조정래, 황석영과 같은 작가들의 작품이 밀란 쿤데라의 그것보다 수준이 떨어지는가? 글쎄, 그건 잘 모르겠다. 뭐, 그럴 수 도 있는 거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제대로된 번역과 홍보가 여실히 부족하다는데 있지 않을까. 아무튼 한국문학에 대한 이런저런 아쉬움도 들게 했던 [농담]이었다.


셋. 민속문화.
또 책 속에서는 모라비아의 민속음악과 축제에 대한 작가의 애정과 관심이 돋보인다. 이전에 단 한번도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민속문화이지만, 책 속에서 처음 접한 모라비아 전통 결혼식 과정과 <왕들의 기마 행렬>에 대한 묘사는 나로 하여금 알 수 없는 흥분을 느끼게 했다. 수백년을 넘게 반복되고 내려오고 있다는 점에서, 민속은 어떤 식으로든 그 민족에게 통하는 '진정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다. 그 민족의 구성원에게 소속감과 일체감, 알 수 없는 어떤 초월된 감정, 환희, 도취를 가져 올 수 있는 것이 바로 '민속'이 아닐까. 그 민족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어떤 표식, 형식, 대사, 절차, 등등. 수백년의 역사가 있어야만 느껴지는 그 '진정성'까지. 특히 마지막 '고향'으로의 회귀를 통해 치유되는 루드빅의 모습에선 눈가에 아릿한 기분이 들기까지 했다.

방황을 마치고 돌아와 편안함을 느끼는 루드빅과, 한평생을 민속에 다 바쳤지만 점점 그 민속이 퇴색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운 야로슬라브의 모습은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사회에서 '민속'이 가지는 양면적인 모습을 대변하고 있는건 아닌지. 어떤 면에선, '계륵'일 수 밖에 없는 민속문화.


넷. 책을 읽고 느낀.
아무런 악의 없이 내뱉은 말 한마디가, 저항할 수 없는 사회의 그물에 걸려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채 파괴시켰는데, 그런 파괴에 좌절하고 익숙해지면서 [그들]에 대한 복수심으로 살아왔는데, 어느덧 이젠 복수가 가능해졌다고 생각한 그 순간, [그들]은 그때의 [그들]이 아니라 이젠 나의 그 한마디를 농담이 아닌 진담으로까지도 내뱉는 [그들]이 되어있고, [나]는 오히려 아직도 과거의 환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발견한다면. 자신의 지난 과거와 노력이 모두 무의미해졌다는 느낌이 든다면. 결국 잘못한건 나도, [그들]도 아니라 이 세상 전체라는 걸 깨닫는다면. 이 세상이 너무나도 좁게 엉켜있어 도무지 헤어나오지 못하겠다면. 무언가 어디엔가 잘못한 게 있다고 끝없이 믿는 바람에 결국 나 스스로를 파괴했었다는 걸 깨닫는다면. 내 속의 견고한 성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면.


갈무리들과. 몇개의 첨언들.

128쪽
그러나 오늘날 나는 그를 무엇보다, 한 젊은이로, 연기를 하는 한 사람으로 보게 된다. 어찌 됐거나 젊은이들이 연기를 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삶은, 아직 미완인 그들을, 그들이 다 만들어진 사람으로 행동하길 요구하는 완성된 세상 속에 턱 세워놓는다. 그러니 그들은 허겁지겁 이런저런 형식과 모델들, 당시 유행하는 것, 자신들에게 맞는 것, 마음에 드는 것, 등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그리고 연기를 한다.

163쪽
도대체 어째서 나는 어른으로 심판받고 추방되고 트로츠키주의자라고 선언되고 탄광으로 보내지고 그렇게 모든 데에서 어른이어야 하면서 사랑에서만은 어른이 될 권리도 없고 이렇게 미숙해서 모든 창피를 감수해야 한다는 말인가?

////젊은이-어른 이야기에 스무살인 나로써는 너무나도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376쪽 - 예전과는 다른 요즘 젊은이들에 대한 제마넥의 이야기.
나는 그렇게 보지 않아. 나는 그들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바로 그래서 그들을 높이 사. 그들은 자신의 육체를 사랑하지. 우리는 무시했잖아. 그들은 여행을 좋아해. 우리는 한곳에서 처박혀 있었는데. 그들은 모험을 좋아하지. 우리는 회의하느라 시간을 다 보내고 말았는데 말이야. 그들은 재즈를 좋아해. 우리는 부질없이 민속 음악이나 흉내냈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에 골몰해 있지. 우리는 세상을 구원하고자 했고. 우리는 우리의 메시아주의를 가지고 세상을 망가뜨릴 뻔했지. 이제 그들이, 그들의 이기주의를 가지고 이 세상을 구하게 될지도 몰라.

////제마넥의 체코의 예전과 오늘의 젊은이들에 대한 비교는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이 예전의 젊은이들이었던 분들로부터 계속 지적받고 있는 점과 너무나도 유사하다.


92쪽
우리는 하도 끔찍하게 길어서 가로등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여자를 보러 갔다. 끔찍하게 생긴 여자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우리가 가까이 할 수 있는 여자는, 특히 우리에게 거의 여가가 없었으므로, 극히 제한되어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토록 짧고 그토록 드물게 주어지는) 자유의 순간들을 반드시 잘 이용해야만 하기 때문에 병사들은 괜찮은 것보다는 접근 가능한 것을 택했다. 시간이 가면서 그리고 서로 탐사 결과들을 주고 받은 끝에 비교적 수월한 (그리고 물론 겨우 참아줄 만한) 여자들의 조직망이 (아주 빈약하나마) 공동 사용을 위하여 형성되었다.
가로등은 이 공동 조직망에 속했다. 나는 전혀 상관없었다. 두 친구가 그녀의 비정상적인 키에 대해 농담을 하기 시작해서는, 벽돌은 한 장 구해서 그때가 오면 우리 발밑에 받쳐야 할 것이라고 오십 번은 되풀이해 말하고 있었는데, 이 농담들이 내게 묘하게도 기분 좋게 느껴졌다. 여자에 대한 나의 강렬한 욕구를 더 자극해 주었던 것이다. 어떤 여자라도 좋았다. 개인화되지 않을수록 그 여자에게는 영혼이 없을 것이며 그편이 훨씬 나았다.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 어떤 여자인 것이 좋았다.
술을 아주 많이 마셨는데도 불구하고, 가로등이라는 그 여자를 보자 내 광적인 욕망은 사그라들어 버렸다. 모든 것이 역겹고 공허해 보였다. 그리고 다음날 친하게 지내는 혼자도 스타나도 옆에 없자 나는 지독한 숙취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이제 2주 전에 있었던 그 일까지 진저리를 치며 앞으로는 술 취한 가로등이든 농기계 좌석에 앉은 여자든 할 것 없이 절대 가까이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106쪽
그러나 이러한 태도의 변화는 단지 이성과 의지의 차원에 있는 것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나의 잃어버린 운명에 대해 내가 속으로 흘리는 눈물은 마를 수가 없었다.

232쪽
사실상 내가 한 여자에게서 좋아하는 것은 그녀 자체가 아니라 그녀가 내게 다가오는 방식, <나에게> 그녀가 의미하는 그 무엇이다. 나는 한 여자를 우리 두 사람의 이야기의 등장 인물로서 사랑한다. 햄릿에게 엘시노어 성, 오필리아, 구체적 상황들의 전개, 자기 역할의 <텍스트>가 없다면 그는 대체 무엇이겠는가? 무언가 알 수 없는 공허하고 환상 같은 본질 외에 그이게 무엇이 더 남아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루치에도 오스트라바의 변두리가 없다면, 철조망 사이로 밀어넣어 주던 장미, 그녀의 해진 옷, 희망 없던 내 오랜 기다림이 없다면, 내가 사랑했던 루치에가 더 이상 아닐지도 모른다.

238쪽
사람들이 더 많아지자 나는 곧 이런 곳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모르는 무단 침입자 같은 느낌이 들어서 바깥으로 나왔고, 시계를 보았고 내 죽은 시간이 참으로 집요한 삶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텅 빈 시간을 이용하기 위하여 나는 헬레나를 기억해 보고, 그녀에 대한 생각을 해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생각이 이어지질 않고 그대로 머문 채 겨우 헬레나의 모습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하기는 남자가 여자를 기다릴 때 그 여자에 대해서 무슨 생각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고 오로지 그녀의 고정된 초상화 밑에서 맴돌게 될 뿐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267쪽
대개 여자가 자기 정부에게 남편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것은 품위 때문이라든가 아니면 정말 순수해서인 경우는 아주 드물고, 다만 정부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이런 걱정을 없애주면 여자는 고마워하면서 훨씬 마음이 편해지고, 무엇보다도 특히 대화의 소재가 무한히 열려 있는 것이 아니므로 무언가 이야기할 거리를 얻게 된다. 그리고 결혼한 여자에게는 남편이란 꿈 같은 주제, 그녀가 자신감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주제, 자신이 <전문가>로서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주제를 제공해 주는 것이며, 어찌 되었든 사람은 누구나 전문가로서 행세하고 자신을 내세우기를 즐기는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가 내게 거슬리지 않는 다는 것을 안심시켜 주자 헬레나는 완전히 긴장을 풀고 파벨 제마넥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는데, 옛일을 회상하는 가운데 감정이 고조되어서는 제마넥에 대해 아무런 부정적인 이야기도 덧붙이지 않았다.

315쪽
하루는 그녀에게 하느님을 믿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녀의 답은 내겐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주 살짝 어깨를 으쓱하며, ‘모르겠어요’라고 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는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녀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실은 그녀는 그분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분의 이름은 그녀에게 있어 막연히 크리스마스를 연상시키는 어떤 것과, 아무 의미도 형성하지 못하는 두세 개의 희미한 상징과 관련되어 있을 뿐이었다. 루치에는 그때까지 신앙도 무신앙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랑에 빠진 남자가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의 몸에 다른 어떤 남자의 몸도 먼저 지나쳐간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체험할 법한 그런 현기증을 느꼈다.

344쪽
코스트카는 그녀에게 더 많은 것을 의미하였고, 그녀를 위해서 더 많은 것을 하였으며, 그녀를 더 잘 사랑할 줄 알았다(더 많이는 분명 아닐 것이다. 내 사랑의 힘은 극도에 달했었으니까).

396쪽
그렇다, 내가 제마넥 앞으로 나아가 그의 따귀를 때렸어야 했던 것은 바로 그때, 대학 강당에서, 제마넥이 ‘교수대 아래에서 쓴 르포’를 낭독하고 있었을 때, 바로 그때였고 오로지 그때뿐이었다. 미루어진 복수는 환상으로, 자신만의 종교로, 신화로 바뀌어버리고 만다. 그 신화는 날이 갈수록 신화의 원인이 되었던 주요 인물들로부터 점점 더 분리되어 버린다. 그 인물들은 사실상 더 이상 예전의 그들이 아닌데, 복수의 신화 속에서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제 예전의 얀이 아닌 다른 얀이 역시 예전의 제마넥이 아닌 다른 제마넥 앞에 서 있는 것이며, 내가 그에게 날려야 하는 따귀는 다시 되살릴 수도 다시 복구할 수도 없이 영원히 사라져버리고 만 것이다.

428쪽
그때 나무에 죽 연결된 긴 전선에 매달린 램프들에 불이 밝혀졌다. 아직 날이 어두워지지는 않고 해가 막 저물기 시작하려는 무렵이었기 때문에, 그 램프들은 밝은 빛을 퍼뜨리지는 못하고, 마치 움직이지 않는 커다란 눈물 방울들처럼 잿빛의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닦아낼 수 없는 그리고 흘러내리지도 못하는 하얀색 눈물 방울들처럼.

2007. 5. 9. 01:43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밀란 쿤데라

사실 이 책은 지난 겨울방학동안에 읽었던 책이고, 지금 동일 저자의 [농담]을 읽고 있다. [농담] 포스팅 전에 왠지 포스팅하고 싶어서ㅎㅎ 사랑에 대한 역사상 가장 솔직하고 정확한 소설이라는 그의 소설. 읽으면서 다양하게 공감도 하고, 이해가 안가기도 하고, 책의 넓은 스펙트럼에 감상도 삐죽삐죽 다양하기만 했던 기억이 있다. 공산주의 시절의 체코가 이 책도, 또 [농담]에서도 배경이 되는데, 스탈린주의에 대한 여러 생각도 가지게 만든다. 그러고보니, 최근 내가 체코랑 인연이 많구나ㅎㅎ 아래 토마스의 이야기는 나로써는 열렬한 공감을 자아냈고, [비굴의 인플레이션]이라는 표현은 소름끼칠정도로 감탄스러웠다. 독특한 소설의 구성방식이 생소했는데, 찾아보니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의 시초라고도 하더라. 하여튼 그놈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밀란 쿤데라는 문장구성방식이 왠지 나랑 스타일이 맞는 느낌이다.(너무 건방진 소린가?ㅎ) 쉼표와 형용사의 겹치기 사용, 괄호를 통한 중간중간 끼워넣기. 글을 쓰다보면 이 두가지가 많이 사용되는 걸 느낀다. 문어적이기 보단 구어적인 특성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어찌됬든, 읽어볼만한 책이다. 사랑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사족을 달자면.. 요즘 사랑에 관련된 책을 많이 읽는 구나..)


그리고 또 갈무리들. 정말 맘에 들었다.

25페이지
토마스는 자신에게 말했다. 여자와 잔다는 것과 여자와 잠든다는 것은 두 가지 상이한 열정일 뿐만 아니라 정반대의 열정이야. 사랑은 성교행위의 욕구에서 표명되는 것이 아니라(이 욕구는 무수한 여자에게 해당된다), 공동의 수면 욕구에서 표명된다(이 욕구는 오직 한 여자에게만 해당된다).

67페이지
마술처럼 신비스런 것은 필연이 아니고 우연이다. 사랑이 잊을 수 없는 것이 되자면 처음 순간부터 우연들이 사랑 위에 내려앉아 있어야 한다. 마치 성자 프란츠 폰 아시시의 어깨 위에 내려 앉은 새들처럼.

141페이지
그녀는 말했다. [그런데 왜 당신은 그 힘을 종종 내게 쓰지 않나요?]
[사랑은 힘을 포기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오] 하고 프란츠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사비나에게는 두 가지 사실이 확실해졌다; 첫째, 방금 프란츠가 말한 이 문장은 참되고 아름답다는 것, 둘째, 바로 이 문장은 그녀의 에로틱한 삶에서 프란츠를 격하시켰다는 것이 그것이다.

222페이지
토마스는 이상한 것을 눈치챘다. 말하자면 모두가 그에게 미소지었다. 모두가 그가 철회성명을 쓰기를 바랐다. 그렇게 한다면 그는 모두에게 일종의 기쁨을 마련해 주었을 것이다. 한쪽 사람들은 비굴의 인플레이션이 그들 자신의 행동을 대수롭지 않게 만들어 그들에게 잃어버린 명예를 되돌려 주기 때문에 기뻐했을 것이다. 다른 쪽 사람들은 자신들의 명예를 그들이 포기하려 하지 않는 각별한 특권으로 간주하는 데 익숙해 있었다. 그 때문에 그들은 비굴한 사람들에 대한 은밀한 애정을 품고 있었다. 이들 비굴한 자들이 없이는 그들 자신의 확고한 태도는 일상적인, 소용없는, 아무도 경탄해 주지 않는 노력이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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