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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9. 6. 01:21
[]
The Pickup
나딘 고디머 Nadine Gordimer
Penguin Books


아파르트헤이트 이후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부유한 백인의 딸인 줄리 Julie이지만 그녀는 그런 아버지를 부정하고 싶어하며 자립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고장이 났는지 갑자기 그녀의 차가 길 한가운데서 멈춰서고, 자동차 수리공이자 불법 이민자 무슬림인 압두 Abdu가 마침 그녀를 발견하고는 도와준다. 그 인연이 어찌어찌 이어져 둘은 사랑에 빠지지만, 어느날 압두에겐 추방 명령이 내려지는데....


재작년 대학 들어갈 때 신입생 대상으로 읽으라고 나눠준 책이다. 그땐 안읽었었는데, 이번에 마침 책이 보이길래 읽어봤다.

하나. 시점
전지적 작가 시점이었다가, 줄리의 시점이었다가, 압두의 시점이었다가 - 책은 화자를 자연스럽게 넘기고 바꾸어 가면서 진행된다. 두 주인공이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각 주인공의 속 생각이 '나'라는 주어로 쓰여져 있는 식인데, 문맥상 그 '나'가 줄리인지 압두인지 파악할 수 있게 해 놓긴 했지만 내 짧은 영어실력에 글 자체의 모호함 - 분명 원어민도 헷갈려 할거야! - 이 덧붙여 지면서 몇몇 부분에서는 대체 이 말의 화자가 누군지 너무나 헷갈렸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글의 시점 덕분에 책을 읽는 것에 상당한 정신력을 소모하게 되긴 하지만, 이 책이 각종 정치/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한 사랑이야기 임을 고려하면 같은 상황과 행동, 말에 대해 두 주인공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확실하게 드러내는 것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 같다.

둘. 인물
두 주인공의 신분 (혹은 사회경제문화적 지위)에서 어느 정도 책 속의 내용들을 미리 예상할 수 있다. 날때부터 모든걸 다 가진 줄리의 아버지에 대한 반항이나, 줄리에게 자신의 가족, 고향, 과거를 부끄러워하는 압두의 모습, 그리고 그런 것들에서 커져가는 둘 사이의 갈등. 각자의 주어진 환경 속에서 충분히 이해할만한 그들의 부정적인 모습들이지만 사실 책 속에서는 압두의 부정적임이 줄리의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이 부각되어 있다. 항상 사랑 앞에 진실하고 모든 걸 던질만큼 용감했던 건 압두보다는 줄리였고, 압두는 그런 줄리의 용감함을 부르주아계층 특유의 무모함 - 모든 것들을 힘들게 쟁취한 것이 아니라 당연스레 가지고 있었기에 잃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래서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 으로 바라본다. 덕분에 대부분의 독자들이 압두보다는 줄리의 편을 들게 될 것 같다. 나 역시 압두가 답답했는데, 글쎄, 어쩌면 그건 압두에게서 지난 날의 내 모습들을 발견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셋. 재미
헷갈리는 글 때문인지 솔직히 책은 별로 재미 없었다.......... 별로 추천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는..



그리고 갈무리들.

Page 119
The presence - this woman [Abdu's mother] with a beautiful face (she knew it was his mother he would look like) asserted beneath a palimpsest dark fatigue and grooves of unimaginable experience, addressed her majestically, at length and in their language, but her gaze was on her son and tears ran, ignored by her, down the calm of her cheeks.
//palimpsest의 뜻 - 거듭 쓴 양피지의 사본(씌어 있던 글자를 지우고 그 위에 다시 쓴 것) - 을 사전에서 찾아보곤 palimpsest dark fatigue 라는 표현에 너무나도 감탄해버렸다.

Page 150
... pink flowers are thick with dust, like a woman who uses too much powder.
//화장을 안한 모습을 더 좋아하는 나로써는 거꾸로 된 비유가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다. 화장은 장미꽃 위에 두껍게 쌓인 먼지 같은거야~


2009. 8. 25. 09:24
[]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One Flew Over the Cuckoo's Nest
켄 케시 Ken Kesey
Penguin Classics Deluxe Edition


책으로보단 영화로 훨씬 더 유명한 작품. 처음 영화를 봤던게 고1 겨울방학때였는데, 잭 니콜슨의 멋진 연기가 일품이었다. 부조리한 정신병원 내의 현실을 바꿔보려고 애쓰는 제정신인 사람 맥멀피가 끝내는 정신병자가 되고 병원은 변하지 않는 걸 보고 저게 사실은 이 전체 사회에 대한 비유가 아닐까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하나. 시점
책은 추장 Chief의 1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펼쳐지는데, 그가 사실은 제대로 듣고 말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는 귀머거리에 벙어리라고 알려져 있다는 설정이다. 그래서 책 속 인물들은 주변에 그가 있든 없든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고 그는 그 모든 것을 모르는 척 하며 듣는다. 이러한 설정은 단순한 관찰자 시점이 가지는 시야를 넘어설 수 있게 하고, 덕분에 1인칭 특유의 흥미로움을 유지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전지적 시점처럼 극을 이끌어 갈 수 있게 한다. 거기에 실제로 정신질환을 갖고 있는 추장의 독특한 비유적 상황해석이 덧붙여지면서 작가는 책의 배경 설정이나 주제에 너무나도 탁월하게 부합하는 방식으로 글을 이끌어 간다. 아주 기막힌 방법. (그러고보면 언제부턴가 내가 책의 시점에 대해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다.)


둘. 주제?
이 책을 이해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고1의 내가 영화를 보고 생각했던 것처럼 병원을 전체 사회에 투영시켜 본다면, 부조리한 세상에 불평불만은 많으면서도 사실상 비겁한 용기없음에 자발적으로 시대에 순응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볼 수 있다. 맥멀피가 명백한 전과자에 문제투성이임에도 불구하고 수간호사 Big Nurse에 대적하는 그에게 독자들은 (혹은 영화 감상자들은) 감정이입하면서 자연스레 동조하게 되는데 이 또한 사실 진짜 큰 문제는 개개인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있다는 메세지로 해석할 수도 있을거고, 또 완벽하지 않은 리더인 맥멀피가 병원 구성원들로부터 어떻게 의심받게 되는가를 따라가다 보면 이 미쳐버린 세상에 리더가 갖춰야 할 덕목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주인공들의 성적 정체성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책을 본다면, 자신의 여성성을 철저하게 감춘 채 사무적이고 냉정하게 근무하며 병원 내 남자 환자들의 남성성마저도 거세해 버린 수간호사와 그런 그녀에게 맞서는 자유분방한 강간전과자(!) 맥멀피의 모습에 주목할 수도 있다.

고1때에는 단순히 수간호사를 악역으로만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읽으면서 사실은 그녀가 악역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됬다. 그녀는 그녀 자신의 방법이 철저하게 옳다고 믿으면서 그것을 철저하게 실행할 뿐이다. 긍정적인 단어들만으로 표현한다면 -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진정성을 다해 그 신념을 추구하는 - 그녀를 단순히 악역으로만 생각하기 힘들어진다. 내가 그 신념과 진정성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신념이 나를 살아가고 나는 그 속에 함몰되어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셋. 영화
영화가 불후의 명작으로 칭송받고는 있지만, 책을 읽고나서 다시 영화를 보니 충분히 책을 살려 표현해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아쉬운 부분들이 많았고 그 점에서 책을 읽는 것을 강력히 추천하고 싶은데, 검색해보니 아무래도 국내에는 영화 극본외에 소설 자체가 번역/출간되지는 않은듯 하다.




그리고 갈무리들.

책 속엔 정말 기가 막히는 비유들이 많았다. 정신병원이라는 배경과 정신병자라는 인물들, 그리고 화자 자체도 정신병자라는 사실 덕분에 작가는 흐릿하고 환영적인 만화적인 표현과 비유들을 많이 쓰는데, 읽으면서 몇 번을 탄성을 지었는지 모른다. 웃음이 턱에서 뚝뚝 떨어져 내린다, 어두운 불빛이 희미한 가루를 뿌려놓은 것만 같다, 거울이 부서지는게 마치 물방울 튀는 모양 같다, 안개 속에서 흩어지는 사람들의 얼굴이 (사육제나 혼례 같은 때 뿌리는) 색종이 조각 같다, 회의 말미에 수간호사가 커피잔을 내려 놓는 소리가 마치 의사봉 소리같다, - 너무나도 기가 막힌 표현들이었다.

Page 24
"Ya know, ma'am," he says, "ya know - that is the ex-act thing somebody always tells me about the rules..."
He grins. They both smile back and forth at each other, sizing each other up.
"...just when they figure I'm about to do the dead opposite."

Page 45
The Big Nurse was furious. She swiveled and glared at him, the smile dripping over her chin.

Page 47
Pete had that big iron ball swinging all the way from his knees. The black boy whammed flat against the wall and stuck, then slid down to the floor like the wall there was greased.

Page 56
Harding takes a long pull off the cigarette and lets the smoke drift out with his talk.

Page 77
The light of the dorm door five hundred yards back up this hole is nothing but a speck, dusting the square sides of the shaft with a dim powder.

Page 86
Her own grin is giving away, sagging at the edges.

Page 118
So for forty years he was able to live, if not right in the world of men, at least on the edge of it.

Page 119
The faces blow past in the fog like confetti.

Page 131
I been in meetings where they kept talking about a patient so long that the patient materialized in the flesh, nude on the coffee table in front of them, vulnerable to any fiendish notion they took.

I been at it so long, sponging and dusting and mopping this staff room and the old wooden one at the other place, that the staff usually don't even notice me; I move around in my chores, and they see right through me like I wasn't there - the only thing they'd miss if I didn't show up would be the sponge and the water bucket floating around.

Page 136
She takes another sip and sets the cup on the table; the whack of it sounds like a gavel; all three residents sit bold upright.

Page 141
I smelled the breeze. It's fall coming, I thought, I can smell that sour-molasses smell of silage, clanging the air like a bell.

Page 160
McMurphy cuts the deck and shuffles it with a buzzing snap. ...... He cuts to shuffle again, and the cards splash everywhere like the deck exploded between his two trembling hands.

Page 172
...[he] ran his hand through the glass. The glass came apart like water splashing.

Page 201
There were little brown birds occasionally on the fence; when a puff of leaves would hit the fence the birds would fly off with the wind. It looked at first like the leaves were hitting the fence and turning into birds and flying away.
2009. 8. 3. 05:56
[]
분노의 포도 The Grapes of Wrath
존 스타인벡 John Steinbeck
Penguin Classics


집에 있는 세계문학전집의 1권이었던 이유로 (그래도 읽지는 않았었지만) 제목만큼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책이었다. 나도 왠지 모를 이유로 제목에서 굉장히 오래된 책이라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1930년대에 관한 책이라는 사실에 괜히 놀래버렸다.

1930년대, 대공황 시대가 닥치자 은행들은 서류상으로만 소유하고 있었던 미국 남부의 척박한 땅들까지도 소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하고, 주인 없는 땅이라고만 생각하고 2-3대째 개간한 끝에 가까스로 자리잡고 살아가고 있던 농민들은 쫓겨나게 된다. 이 [분노의 포도]는 그런 농민 가족 중 하나인 조드 가족이 생존을 위해 캘리포니아로 이주하는 길 위에서, 그리고 캘리포니아에 도착해서 겪는 일들에 관한 책이다. 당시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던 스타인벡은 실제로 주변 이주민들의 처참한 삶을 보게 되고, 그 내용을 책으로 쓰기로 마음 먹고는 오클라호마로 직접 찾아가서 한 이주가정과 동행하며 취재한 끝에 이 작품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황석영의 [객지], [삼포 가는 길]로 대표되는 우리네 1970년대의 현실주의 작품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처참하리만큼 보편적인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너무나 한국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했던, 그리고 우리네만 겪은 역사라는 생각에 부끄러우면서도 (어느정도는) 그 과거를 이겨낸 현실에 자랑스러워했던 부분들 전부를 이 책에서 만날 수 있었다. 한恨의 정서, 가족애, 모성의 위대함 등은 우리들 만의 것이 아니었다. 내심 미국 애들을 향해 - 니네가 이걸 알어? - 라고 생각했던 우리 부모님 세대의 과거는, 그들이 겪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우리보다 50년 일찍 겪었던 것이었다. 더욱 재밌는 사실은, 내가 1970년대의 한국을 병치하며 공감할 수 있었던 이 책이 독자들이 꼽은 역사상 가장 미국적인 소설 1, 2위를 다툰다는 점이다. 미국 독자가 잘 번역된 [삼포 가는 길]을 읽는 다면, 그는 반대로 분노의 포도를 떠올리며 나처럼 삶의 보편성에 대해 놀라워 하지 않을까.

책은 이렇게 내게 생각치도 못한 깨달음을 주었지만, 그 지독한 내용 덕분에 반가움이기 보다는 숨막힘에 더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특히 책 중간 어머니의 위대함이 공포스러울 정도로 표현된 부분에선 울컥 하고 말았다.) 책 속의 각종 인간군상들의 관계가 단순한 가해자-피해자의 구도를 넘어서서 자본주의라는 제도 아래에서 모두가 피해자일 수 밖에 그 현실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작가는 인간의 비인간성에 대해 강력히 고발하면서도, 그 도무지 감당할 수 없을 것만 현실들을 '굳게 다문 입 사이로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살아가는 조드 가족의 모습을 통해 생명의 소중함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게 한다.


시간이 흘러도 꾸준히 읽히는 위대한 책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다. 책이 쓰여진 시대를 초월하는 내용이거나, 그 시대를 대표하는 내용이거나. [분노의 포도]는 후자에 속하는 책일거다. 아니, 후자에만 속하는 책이었으면 좋겠다. 미국의 1930년대를 대표하는 이 책의 내용이 한국의 1970년대와 공감대를 가지고, 또 지구상의 어느 나라에서는 지금 이 2000년대의 현실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텐데, 책이 보여주는 자본주의의 부조리함과 인간의 비인간성이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성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갈무리들.

Page 11
He[Joad in a truck] rubbed the butt to a pulp and put it out the window, letting the breeze suck it from his fingers.


Page 72
Tom stood looking in. Ma was heavy, but not fat; thick with child-bearing and work. ...[중략]... She looked out into the sunshine. Her full face was not soft; it was controlled, kindly. Her hazel eyes seemed to know, to accept, to welcome her position, the citadel of the family, the strong place that could not be taken. And since old Tom and the children could not know hurt or fear unless she acknowledged hurt and fear, she had practiced denying them in herself. And since, when a joyful thing happened, they looked to see whether joy was on her, it was her habit to build up laughter out of inadequate materials. But better than joy was calm. Imperturbability could be depended upon. And from her great and humble position in the family she had taken dignity and a clean calm beauty. From her position as healer, her hands had grown sure and cool and quiet; from her position as arbiter she had become as remote and faultless in judgment as a goddess. She seemed to know that if she swayed the family shook, and if she ever really deeply wavered or despaired the family would fall, the family will to function would be gone.

Page 77
Tommy, looking at her, gradually drooped his eyelids, until just a short glitter showed through his lashes.

Page 225
"You think it was a sin to let my wife die like that?"
"Well," said Casy, "for anybody else it was a mistake, but if you think it was a sin - then it's a sin. A fella builds his own sins right up from the groun'."

Page 230
"It's purty," she said. "I wisht they[Grampa and Granma] could of saw it."
"I wisht so too," said Pa.
Tom patted the steering wheel under his hand. "They was too old,"he said. "They wouldn't of saw nothin' that's here. Grampa would a been a-seein' the Injuns an' the prairie country when he was a young fella. An' Granma would a remembered an' seen the first home she lived in. They was too ol'. Who's really seein' it is Ruthie an' Winfiel'."
Pa said, "Here's Tommy talkin' like a growed-up man, talkin' like a preacher almos'."
And Ma smiled sadly. "He is. Tommy's growed way up - way up so I can't get a holt of 'im sometimes."

Page 283
The local people whipped themselves into a mold of cruelty.

Page 284
The great companies did not know that the line between hunger and anger is a thin line.
2009. 7. 10. 05:18
[]
콜레라 시대의 사랑 Love in the Time of Cholera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Gabriel García Márquez
Vintage International

부유한 상인의 딸인 페르미나와 가난한 청년 플로렌티노는 열렬한 사랑에 빠지지만, 페르미나의 아버지의 반대로 둘은 이어지지 못한다. 페르미나는 콜레라 퇴치로 도시 전체의 존경을 받던 젊은 의사 우르비노와 결혼하고, 그런 페르미나를 잊지 못한 플로렌티노는 의미없는 사랑을 나누며 우르비노가 죽은 다음 다시 페르미나에게 사랑을 고백하리라 다짐한다. 셋 다 노년에 접어든 어느 날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우르비노가 죽게 되고, 처음 사랑을 고백한지 51년 9개월 하고도 4일이 흐른 날 플로렌티노는 페르미나에게 다시 한번 사랑을 고백하는데...



[백년동안의 고독]과 함께 마르케스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소설이다. 영화 [세렌디피티]에서 사랑의 메신저 역할을 했던 책이라는 첫인상으로 많은 이들이 제목을 기억할 것 같다. 네이버 책 설명에 따르면 미국이나 라틴 아메리카의 대형 서점에서 해마다 발렌타인 데이가 되면 불멸의 사랑을 대표하는 책으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닥터 지바고]와 함께 이 책을 전시해 놓는다는데, 글쎄, 저게 불멸의 사랑일까.

하나. 사랑.
읽는 내내 생각한 것이 저 부분이었다. 플로렌티노의 그것을 과연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책 내용을 단 한 문장으로 "목숨이 다할때까지 한 사람만을 기다린 남자의 이야기" 정도로 줄인다면 매우 로맨틱해 보일 수 있겠다만, 아주 조금만 늘려서 "젊은 날 첫사랑을 잊지 못해 이여자 저여자와 침대에서 뒹굴며 그 첫사랑을 대체할 사람을 찾아보지만 결국 실패하고, 그 첫사랑의 남편이 죽는 날만을 50년 넘게 기다린 남자의 이야기"정도로만 표현해도 벌써 뭔가 징그러운 기분이 들면서 그것이 집착인지 사랑인지 헷갈리게 된다. 하물며 책 한권이 그 50여년에 관한 이야기인데, 기다림에 관한 수십개의 에피소드를 읽다 보면 플로렌티노의 남루함과 어처구니없음에 -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가 - 하는 생각이 안들 수 없다. 첫사랑을 잊지못해 카사노바가 되어 수많은 과부와 여자들과의 정사를 가지면서도 첫사랑을 향한 순수한 마음만큼은 간직해 왔다는 그 진부한 캐릭터야 백년전을 배경으로 한 이십년 전 소설이니까 그려러니 하더라도, 도무지 나는 저게 집착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내 가치관으로는, 어릴적 환상을 키워 신화로 만들어서는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되어서도 필요할때마다 그 안에 숨고 피해서 자위하고 있는 모습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결국 그 51년 9개월 4일이 흘러 둘이 노년에 다시 사랑을 시작하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좋았던 점은, 현재와 그 스무살 시절의 과거를 연결지으려는 플로렌티노의 노력과 달리 페르미나는 충실히 현재를 살아갔다는 점이다. 페르미나가 그를 여전히 잊지 못해서 혹은 과거의 아름다웠던 기억의 연장에서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이 모습의 플로렌티노를 사랑하고 받아들인다는 설정이 참 맘에 들었다.

책은 그랬다. 과도한 묘사와 대사들이 종종 잔뜩 기름칠 한 느끼함을 주기도 했지만, (플로렌티노가 50년을 기다린다는 설정을 제외하면) 책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상황만큼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 답지 않게 담백하고 현실감 있었다. 어이없는 우르비노의 죽음이나 50년간의 기다림 속에서 플로렌티노가 겪는 상황과 감정, 그리고 다시 사랑하는 과정들이 지나친 감상주의나 로맨틱함에 함몰되지 않고 현실성 있게, 때로는 그로 인해 너무 덜 로맨틱하게 진행되었다. 일상에 관한 자세한 묘사와 작은 상황들의 현실성에 이 책이 시작부터 갖고가는 비현실성 - 불멸의 사랑 - 이 희석되어 독자들이 책을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지않았을까. 어쩌면 그런 현실성이 나로 하여금 플로렌티노의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라고 생각하게 한 걸지도 모르겠다.


둘. 문체
마르케스의 문체 자체는 조금 즐기기 힘들었다. 지나치리만큼 과도한 묘사에 불필요해 보이는 에피소드들까지 너무 많이 풀어놓는다는 느낌이었고, 마르케스에 대한 평단에서 말하던 '이야기꾼'이라는 평가가 '수다쟁이'라는 표현의 순화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 정말 수다스럽다. 좀 과장해서 비유하자면, '내가 블로그에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그는 '나'와 관련된 에피소드 하나, 그리고 이어서 '블로그', '책', ;읽는 행위', '글', '쓰는 행위'에 관한 에피소드를 각각 하나씩 늘여놓는다. '나한테 이렇고 저렇고 그런 일이 있었는데, 블로그는 요렇고 고런 장소이고, 책이라 하면 이러저러한 것인데 그것을 읽다가 이러쿵저러쿵한 적이 있었고, ... ... ......' 책을 따라 읽다보면 책이 가고자 하는 큰 줄기가 대체 뭔지 헷갈리는 경우가 많았고 그런 정신없음은 약간의 짜증으로 이어졌다. 그것이 남미 특유의 문체로 세계 문학계를 신선하게 했을지는 몰라도, 나와는 맞지 않았던듯.


셋. 나이 듦
플로렌티노의 50년에 걸친 기다림은 어떤 특별한 시간적 건너뜀 없이 상당히 연속적이라고 느껴지게 묘사된다. 이런 저런 에피소드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문체 덕분이 큰 것 같은데, 50년이라는 시간을 단 한 권의 책에서 풀어놓으면서 '10년 뒤'와 같은 건너뜀이 없다는 것이 상당히 신선했다. 다른 책들에선 어느 순간 한번에 10년, 20년이 흘러 주인공들이 노인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덕분에 독자로써는 그 시간의 무게를 주인공에게 부여하지 못하고 결국 갑자기 늙어버린 주인공에게 이질감을 느끼거나, 혹은 그가 여전히 젊은이라는 느낌을 갖고 책을 읽어나가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플로렌티노가 노년에 접어드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다 보니 나도 그와 함께 온전한 시간을 다 기다려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덕분에 나이 듦에 관한 묘사와 그것이 닥쳤을 때 느끼는 주인공의 감정과 같은 것들이 (물론 나도 50년 더 흘러야 진짜 이해하겠지만) 좀 더 가깝게 다가왔다.


그리고..
간간히(가 아니라 자주) 등장하던 야한 장면 덕분에 문체에 대한 아쉬움을 이겨내고 즐겁게 읽었다... (먼산)



이제 갈무리들.

page 26
Wisdom comes to us when it can no longer do any good.

page 30
He was the first man that Fermina Daza heard urinate. She heard him on their wedding night, while she lay prostrate with seasickness in the stateroom on the ship that was carrying them to France, and the sound of his stallion's stream seemed so potent, so replete with authority, that it increased her terror of the devastation to come. That memory often returned to her as the years weakened the stream, for she never could resign herself to his wetting the rim of the toilet bowl each time he used it. Dr. Urbino tired to convince her, with arguments readily understandable to anyone who wished to understand them, that the mishap was not repeated everyday through carelessness on his part, as she insisted, but because of organic reasons: as a young man his stream was so defined and so direct that when he was at school he won contests for marksmanship in filling bottles, but with the ravages of age it was not only decreasing, it was also becoming oblique and scattered, and had at last turned into a fantastic fountain, impossible to control despite his many efforts to direct it. He would say: "The toilet must have been invented by someone who knew nothing about men." He contributed to domestic peace with a quotidian act that was more humiliating than humble: he wiped the rim of the bowl with toilet paper each time he used it. She knew, but never said anything as long as the ammoniac fumes were not too strong in the bathroom, and then she proclaimed, as if she had uncovered a crime: "This stinks like a rabbit hutch." On the ultimate solution: he urinated sitting down, as she did, which kept the bowl clean and him in a state of grace.
// 마르케스 식 수다스러움의 한 예. 이 전혀 쓸데없는 긴 얘기를 뜬금없는 와중에 풀어놓는다. 그래도 이런게 한두번이면 - 두 주인공이 부부로써 늙어가는 세월에 대한 느낌을 생생히 전해주기 위함이겠구나 - 하고 넘어갈텐데, 내겐 좀 지나치리만큼 많았다. 이래서 수다스럽다고 표현하는 건데, 그런 와중에도 그런 수다가 너무나 인간적이고 현실적이고 생생한지라 마냥 싫어할 수도 없었다. 특히 이 부분은 너무 웃겼다.

Page 189
And then he [Dr. Urbino] wiped him [Florentino Ariza] from his memory, because among other things, his profession had accustomed him to the ethical management of forgetfulness.

Page 190
Florentino Ariza could not bear his [Dr. Urbino's] natural distinction, the fluidity and precision of his words, his faint scent of camphor, his personal charm, the easy and elegant manner in which he made his most frivolous sentences seem essential only because he had said them.

Page 193
Hidden in the darkness of an orchestra seat, a fresh camellia in the buttonhole of his lapel throbbing with the strength of this desire, Florentino Ariza saw Fermina Daza open the three sealed envelopes on the stage of the old National Theater on the night of the first Festival.

Page 266
"I am almost one hundred years old, and I have seen everything change, even the position of the stars in the universe, but I have not seen anything change yet in this country," he would say. "Here they make new constitutions, new laws, new wars every three months, but we are still in colonial times."
//플로렌티노의 삼촌이 죽기 얼마 전 그의 회사를 플로렌티노에게 물려주면서 한 말. 식민사회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책의 시대적 배경은 책에 매우 잘 녹아들어 있다.
2009. 5. 21.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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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자국
이영도
황금가지

하나.
어제 오후 4시에 생각나서 인터넷으로 주문했는데 오늘 아침 10시에 집으로 배달왔다. 서울도 아닌 지방에 택배가 무료로 하루만에 배송되는 한국은 정말 아름다운 나라라는 생각을 했다.

둘.
이영도 특유의 말장난은 여전한데, 내가 나이를 좀 먹은건지 이제 약간씩 질려간다는 느낌도 들었다. 뭐 그래도 아직 즐겁긴 하다.

셋.
이영도 글 특유의 문제도 여전하다. 그는 글의 시작과 전개는 뭔가 멋들어지게 펼쳐내지만, 계속 읽다보면 그 펼쳐진 이야기를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고 글이 어정쩡하게 마무리된다는 느낌이 강하다. 퓨처워커와 폴라리스 랩소디에서도 느꼈던 부분이고, 정말 멋진 세계관을 창조해 낸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도 매우 절실하게 느꼈던 부분이다. 소소한 반전과 말장난을 좋아하고, 펼쳐진 얘기들을 감당해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그는 장편보다는 단편이 더 어울리는 작가인지도 모르겠다. - 그리고 그런 마무리의 성급함이 비교적 가장 적게 느껴진다는 점에서 여전히 그의 최고작은 드래곤 라자 인 것 같다.

넷.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내는 작가라는 직업의 매력에 흠뿍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책이었다. 여전히 가장 절실하게 내 맘을 울렸던 책으로 드래곤 라자를 꼽는 나로써는 드래곤 라자 속 주인공들이 천 년 전의 전설이 되어 책 속 곳곳에서 살아 숨쉬는 모습을 보고는 마치 오래된 친구의 소식을 전해 듣는 듯한 반가움을 느꼈다. 작가가 만들어 놓은 가상 세계에 불과하지만, 그 세계 속에서 나와 같은 수많은 독자들이 동경과 아련함을 느낀다는 사실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독립된 작품이라기 보다는 팬서비스였던 작품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예언자고 왕지네고 이루릴이고 누구고 간에.
17세의 평범한 소년이라 나 자신을 이입하고 투영할 수 있었던,
후치가 그립다.


그리고 좋았던 부분들.

11쪽
자손들을 여름철에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곰팡이쯤으로 여겼던 그의 증조할아버지도 그가 진짜 예언자라고 했고...
// 이영도의 표현에는 이런 촌철살인의 비유가 넘친다. 이런게 좋으면 팬이 되는 거고 이게 싫으면 그를 말장난 한다고 비난하게 되는 걸거다.

229쪽
그 드래곤은 이루릴을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나를 죽이는데 일조하더니 이 표한한 시대에 나를 다시 불러내어 도와달라 말하는 건가.'
'예. 화염의 창 크라드메서.'
'무엇을 근거로?'
'근거나 설명은 필요 없어요. 당신은 나니까.'
크라드메서는 싱긋 웃었습니다.
// 말못할 아련함과 따뜻함을 느꼈다. 내가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인양 반가웠다. 드래곤 라자의 팬이라면 모두가 느꼈을 감정이겠지.

2009. 5. 9.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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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소릴의 드래곤
이영도
네이버캐스트 오늘의 문학 090508


짧은 단편이지만 이영도 식 글의 재미와 철학은 거의 다 맛볼 수 있는 글이다. 반갑게 즐겁게 읽었다.
역시나 맘에 들었던 표현들이 많았다. 내가 바로 그 싸구려가 점점 되어가는 것 같아 뜨끔했다. ㅎㅎ


21페이지
당연하잖소. 자기를 부끄러워 할 수 있는 건 사람뿐이니까.

27페이지
그래요. 싸구려. 위로를 싼 값에 구하면 슬픔도 싸지지. 그러다보면 삶에 남는 게 없소.
사란디테는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정보다 더 값진 것이 없는데 왜 싸구려냐고 항의했다. 경은 어깨를 으쓱였다.
누구였든 상관없었잖소. 그렇게 되면 싸구려지.

29페이지
하지만 공주는 허탈감 비슷한 감정밖에 느낄 수 없었다. 게다가 비관적이게도 그것은 후회를 닮아가기 시작했다.

32페이지
이봐. 누가 당신을 거부했다 해서 당신이 아무도 원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거니와, 사실 그건 거부도 아니었소. 그 겁 많은 새끼는 그냥 무서워한 거요. 거부와 도망은 다르오.

2009. 4. 8.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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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찬란한 태양 A Thousand Splendid Suns
할레드 호세이니 Khaled Hosseini
Riverhead Books
2008/03/27 금요일

여행중에 이동하면서 혹은 이동수단을 기다리면서 거의 3/4 가량을 다 읽었었지만, 개학과 함께 손을 놓고 있다가 봄방학을 맞이하여 이제서야 마무리했다. 리스본의 어느 서점에서 이언 플레밍의 퀀텀 오브 솔리스와 이 책을 사이에 놓고 고민하다가, 더 싸고 더 두껍다는 이유로 선택했던 기억이 있다.


책은 1970년대부터 몇년 전에 이르기까지의 아프가니스탄을 배경으로한 마리암과 라일라라는 두 여성이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작가는 쿠데타, 테러, 전쟁, 이슬람교, 가뭄, 등등의 개인의 의지와 노력과는 상관없는 온갖 배경/환경적 고난 속에서 어떻게 저 두 주인공의 삶이 송두리째 파괴되는지, 또 그 속에서 어떻게 그들이 살아남는지에 대해 다큐멘터리를 풀어가듯 비교적 담담한 어조로 글을 이끌어간다. 그들의 삶의 고통에 대한 나의 '공감'과 '실감'이라는 것이 아마 어설픈 흉내내기에 그쳤을텐데도 불구하고, 나에겐 그런 나의 피상적인 이해조차도 너무나 무겁게 느껴졌다.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환경과 현실이란 것들이 그 둘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다가가는지,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이 답답했다.

책의 힘이란 그런 것일거다. 책을 읽고 나면, 표면적으로만 접했던 이슬람 종교 내의 여성인권 유린이 어떤것인지를 마음으로 느낄 수 있고, 그것을 관통하는 아프가니스탄의 현대사에 대해서도 알게된다. 텔레비전의 뉴스에서 백날 떠들어봐야 여느 뉴스거리일 뿐이겠거니 하고 넘기는 것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한다. 미국으로 망명한 아프가니스탄인인 저자에게 아마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이 이 책을 쓰게 한 주요한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이 그렇게 오랬동안 미국내에서 베스트셀러였던 점을 생각하면, 그리고 책이 미국인에게 수행했을 역할을 생각하면, 이제 그 죄책감에서, 그 빚진 듯한 기분에서 자유로워도 괜찮지 않을까.


그치만 그 외에는 그닥 아무것도 찾을 수 없는 책이었다. 그리고 개인적 취향에서 조금 아쉬웠던것은, 책의 마지막이 주인공의 해피엔딩이 아니라 좀 더 처절한 [현실은 어쩔 수 없다]류의 잔인한 결론이었다면, 읽은 후의 내 마음은 더 무거웠겠지만 글 자체는 좀 더 좋은 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한국 간행물 윤리위원회가 이 책을 [청소년 권장 도서]로 선정했다는데, 정확하다고 생각했다. 뛰어난 책이지만, 이 책은 [청소년]이라는 한정사가 갖는 한계도 어쩔 수 없이 가지는 책이었다. 책이 안좋았다고 비판하는게 아니라 뭐 그냥 저런 생각도 들었다는 거다. ㅎㅎ
2009. 3. 25. 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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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밥바라기별
황석영
문학동네
2009/03/17

새벽 1시. 방학이라 여유는 넘치고, 잠은 딱히 오지 않고, 그렇다고 할일들을 하고 싶진 않아서 책을 펼쳤다. 아무리 황석영 작가의 책이라도 그래도 책인데 읽다보면 졸리겠지, 했지만 결국 밤새 다 읽고나서야 잠에 들었다.


1) 시점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유준과 그의 친구들의 1인칭 시점이 번갈아가면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1인칭 시점이 갖는 친숙함, 편안함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1인칭 시점이 갖는 단조로움도 벗어나는 가장 전형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2) 자전적 성장소설
황석영 작가의 팬으로써 그의 인생역정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았던 나로써는 곧 주인공 준이가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작가 본인임을 금방 눈치챘는데, 사실 작가 본인의 인생과 너무나도 흡사한 나머지 '소설'이라는 느낌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자전적 성장소설이라고 칭하지만 사실 거의 자서전과 다름 없었다고 생각한다. 약간은 사실과 거리를 두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덕분에 이문열 작가의 '젊은 날의 초상'이 많이 오버랩됬는데, 둘 사이의 개인적 취향의 우위는 딱히 정하지 못했다. 둘다 너무나도 좋았으니까 ㅎㅎ

3) 준이.
어린날의 치기에 불과하더라도, 용기를 갖고 모든것에 온몸 던져 부딪히는 준이가, 아니 황석영 작가가 다시 한번 너무나도 부러웠고, 존경스러웠으며, 아련했다. 그리고 결국 그 뜨거운 무언가를 끝끝내 찾지 못하자 포기하고 자살을 시도하는 준이. 당연히 자살시도는 실패로 끝이 나고, 여전히 삶은 제자리일 뿐이지만, 그 모든 경험 뒤에 겪는 제자리의 삶은 그 의미가 다른 법일 거다.

내 결정의 뒷 책임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울지 당연히 지금의 나는 짐작할 수 없다. 하지만, 그냥 한번 씨익 웃으며, 담담하게 그 무게를 지고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인상깊었던 부분은 몇 구절이라기 보다는 책 전체였다고 말하고 싶다. 그만큼 울렸다. 물론 그래도, 특히 좀더 인상깊었던 구절들을 갈무리해 봤다.

41페이지
내가 영길이 너나 중길이를 왜 첨부터 어린애 취급했는지 알아? 아주 좋은 것들은 숨기거나 슬쩍 거리를 둬야 하는 거야. 너희는 언제나 시에 코를 박고 있었다구. 별은 보지 않구 별이라구 글씨만 쓰구.

168페이지
포플러가 우리말로 미루나무인 것처럼 시골 사람들은 플라타너스를 방울나무라고 부르더라.

222페이지
며칠 뒤 미아에게서 엽서 한 장이 날아왔다. 우체국에서 파는 약간 두꺼운 지질의 종이에 우표가 새겨져 있고 뒷면은 백지인 멋대가리없는 관제엽서였다. 거친 만년필로 눌러쓴 글씨가 말하는 것처럼 씌어 있었다.

바람 피해 오시는 이처럼 문득, 전화하면
누가 뭐래요?

227페이지
여름방학 같은 때, 장마중에 비 그치면 아침인지 저녁인지 잘 분간이 안 되는 그런 날 있잖아. 누군가 놀려줄라구 얘, 너 학교 안가니? 그러면 정신없이 책가방 들고 뛰쳐나갔다가 맥풀려서 되돌아오지. 내게는 사춘기가 그런 것 같았어. 감기약 먹고 자다 깨다 하는 그런 나날. 막연하고 종잡을 수 없고 그러면서도 바라는 것들은 손에 잡히지 않아 언제나 충족되지 않는 미열의 나날.

256페이지
그에게는 산다는 게 두렵거나 고생스러운 것도 아니고 저 하늘에 날아가는 멧새처럼 자유롭다. 이른 봄에는 바닷가 간척공사장을 찾아가 일하다가, 오월에 보리가 팰 무렵이면 시골마을로 들어가 보리 베기를 도우며 밥 얻어먹고, 여름에는 해수욕장이나 산간에 가서 일거리를 찾고, 늦여름부터 동해안에 가서 어선을 탄다. 속초에서부터 오징어떼를 따라 남하하다가 울산 근처까지 내려오면 가을이 깊어져 있다. 이제는 다시 농촌으로 들어가 가을추수를 거든다. 황금들판에서 들밥에 막걸리 마시고 논두렁에 누워 곤한 낮잠 한숨 때리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단다. 그리고 겨울에는 다시 도시로 돌아온다. 쪽방을 한 칸 얻고 거리 모퉁이나 버스 종점이나 동네 시장 어귀에 자리를 잡아 드럼통과 손수레 세내어 군고구마 장수로 나선다. 아니면 돈 좀 더 보태어 포장마차를 하든지. 그것도 아니면 이번처럼 괜찮은 도시 공사판을 만나면 함바에서 겨울을 난다. 살아 있음이란, 그 자체로 생생한 기쁨이다. 대위는 늘 말했다.

사람은 씨팔....... 누구든지 오늘을 사는 거야.

261페이지
목마르고 굶주린 자의 식사처럼 맛있고 매순간이 소중한 그런 삶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내가 길에 나설때마다 늘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267페이지
며칠 지나면 다 그렁저렁 좋은 사람들이지. 생각해봐라. 제 힘으루 일해서 먹구 살겠다는 놈들인데 아주 나쁜 놈들이 있겠냐구. 나쁜 놈들이야 저 서울 번듯한 빌딩들 속에 다 있지.

269페이지
저녁 무렵의 신탄진 강변은 언제나 잔잔하고 평화로웠다. 일끝내고 씻으러 내려가면 어두워지기 시작한 강변의 숲과 거울처럼 맑은 수면 위로 가끔씩 물고기들이 뛰어오르는 소리와 함께 작은 파문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보곤 했다. 그럴 때면 물속에 텀벙대며 들어가기가 아까워서 잠시 서 있곤 했다.
2009. 1. 24. 0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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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rt of Travel / 여행의 기술
Alain de Botton / 알랭 드 보통
Vintage International

여행하는 동안 읽었던 책. 나름 첫 배낭여행을 떠나는 지라 이런 책 하나 들고 다니면서 읽어주는 척 하면서 멋있는척 해보고 싶었다.ㅋㅋ 막상 여행하는 동안에는 읽을 일이 없어서 괜히 가져왔나라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여행 마지막에 날씨가 너무 안좋은 날 아주 요긴하게 쓰였다.

출발부터 도착까지의 여러 여행의 단계에서 여행자가 생각하고 느낄 만한 것들에 대해 기존의 작가, 미술가, 시인들이 쓴 글들을 인용하고 거기에 알랭 드 보통이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덧붙이면서 에세이는 진행된다. 사실 여행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해보거나, 혹은 직접 경험해본 사람은 누구나 다 아는, 겪은, 느낀, 그리고 생각한 사실들이기에 내용 자체는 조금 진부하기도 했지만, 내용 자체보다도 그 수많은 인용구에서 그의 폭넓은 독서량에 놀랐고, 다음엔 - 정말 이미 거의 모든 것들이 누군가에 의해 생각되어져 있구나 - 하는 생각이 들면서 역시 책을 많이 읽어봐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됬다.

이번 여행에서 미술과 관련된 부분에 대해 많은 기대를 했고, 나름 미술에 관심이 많기도 해서인지 [예술] 부분의 On Eye-Opening Art (눈을 열어주는 미술에 관하여)와 On Possessing Beauty (아름다움의 소유에 관하여)가 제일 즐거웠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미술 감상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는 내용. 읽고 나서는 스케치하는 법을 연습하고 싶어졌다.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이제 금전적 여유도 좀 생기는데, 책을 사서 보자고. 문제집이나 교과서류가 아니고서야 한번 읽고 마는 책을 사는 것이 항상 아깝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나에게 이경훈 선생님(고등학교 담임선생님)은 - 책은 읽으려고 사는게 아니라 책장에 꽂아두려고 사는 거야 - 라고 말씀해 주시곤 하셨다. 물론 가십거리로 한번 즐기고 말 책을 살 생각은 없다. 그치만, 정말 좋은 책들, 그리고 고전들은 비록 한번 읽고 말지라도 직접 구입하고 싶어졌다. 책을 '소유'하는 것 자체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고나 할까. 아무튼 앞으론 차근차근 한권씩 사서 읽어보련다.


그리고 멋있었던 구절들.

page 98
When asked where he came from, Socrates said not 'From Athens' but 'From the world.'

page 205
How vain painting is, exciting admiration by its resemblance to things of which we do not admire the originals. (Pensée, 40)

2008. 5. 14.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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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치의 마지막 연인 중에서.

정말 마음에 든 사람끼리는 언제나 이런식으로 술래잡기를 한다.
타이밍은 영원히 맞지 않는다. 그러는 편이 낫다.
둘이서 운다고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둘이서 웃는다면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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