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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18. 19:43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 중학교 배치고사를 앞두고 어머니와 누나들은 내게 필승 전략을 알려주었다. 간단했다. - "배치고사 문제집 10권 풀면 수석한다!" - 3일에 한 권씩 한 달간 10권의 문제집을 풀었고, 그렇게 입학식 때 교단 위에서 선서를 했다. 

중학교 과학경시대회를 앞두고는 역대 기출문제를 반복해서 풀었다. 세 번째에 이르자,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아도 소숫점 둘째 자리까지의 답이 기억이 났다. 특정 숫자들이 주는 그 묘한 익숙함. 그렇게 대회가 끝난 얼마 후 중앙일보엔 내 이름이 실렸다.

고등학교 2학년, 매 시험마다 미적분학 성적이 항상 A0 수준을 넘지 못했다. 해당 범위 모든 연습문제를 풀었는데도 안되는 건 안되는 것일까, A+를 받은 친구에게 대체 너는 어떻게 공부했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 친구는 간단히 대답했다. - "두 번 풀었어." 


언젠가부터 뒤쳐져 있다는 기분이 많이 든다. 대학원에 오면서 경쟁과 비교의 범위가 같은 학년 친구들보다 훨씬 더 넓어져버렸기 때문이기도 하고, 실제로 앞서나가는 같은 학년 친구들보다는 뒤쳐졌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연구의 세계는 단순히 무언가를 익히는 것을 넘어 이른바 '창의성'을 발휘하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요즘같이 고도로 발달한 학문의 세계에서, 특히나 수직적 특성이 강한 학문에서라면 진정 창의성이 유의미해지는 것은 대학원 고년차 혹은 박사후 과정이 되어서야 가능한 얘기 아닐까. 어찌됬든, 지금 당장 창의성을 발휘해야 한다고 한들 부족하고 모르는 기초가 너무 많다. 

사실 난 '창의성'이란 개념을 믿지 않는다. 혹은 내가 그렇게 창의적인 학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내가 이룬 학업적 성취라는 것들은 돌이켜 보면 유난한 번뜩임이었기보다는 비효율과 미련함에 더 가까웠다고 하는게 정확할 반복학습의 결과였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뒤따라온 좋은 성과들이 반복의 지루함을 소급해서 미화한 부분도 없지 않겠지만, 사실 반복 과정에서 늘어가는 그 '익숙함'이 주는 즐거움도 컸다. 무언가를 '아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한 내 지적 통제와 소유의 범위 안으로 넣는 것. 악보를 보며 떠듬떠듬 치던 곡을 눈을 감고도 자유롭게 연주하고, 강약이나 리듬의 미묘한 조절까지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는 건 정말 반복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거니까.  

하지만 학년이 오르면서, 그렇게 무식하게 공부하기에는 양과 범위가 너무 많다는 핑계만 점점 늘었다. 효율적 공부랍시고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는데나 시간을 더 쓸 뿐 정작 실제 공부량은 줄었고, 두세 시간 앉아 있었으면 이제 좀 쉬어도 되겠지- 하는 적당주의에 익숙해졌다. 그러면서 아마, 내 반짝임이 조금씩 조금씩 바래왔을 것이다. 다시 반짝이고 싶다. 그래서 다시 무식해지려고 한다. 


농담처럼 사람들에게 허생의 마음으로 박사과정을 보낼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10년 공부를 채우고 세상을 바꾸려던 허생은 아내의 바가지를 이기지 못하고 7년 만에 책상을 박차고 나와 조선 최고의 거부가 됬다. 비록 계획된 나머지 3년을 채우지 못해 세상을 바꾸진 못했지만, 그런 허생도 아마 사서삼경 정도는 줄줄 외웠을 것이다. 내가 그 '10년'을 채울지, 아니면 '7년'에 참지 못하고 책을 덮을지 아직 모르겠지만, 어찌되든 나도 '사서삼경' 정도는 눈감고도 읊어야 겠다. 어디가서 허생 따라했다고 명함이라도 내밀라믄 ㅋㅋ

2013. 9. 18. 00:50

'애는 쓰는데 자연스럽고, 열정적인데 무리가 없어' - 미생 82수

오랜만의 긴 한국에서의 여름, 그동안 못만났던 많은 사람을 만났다. 4년전엔 그 친구 눈에 나는 분명 반짝거리는 아이였는데, 이번 만남에서는 잔뜩 때가 낀 녀석일 뿐이었던 것 같다. 6년만에 만난 어떤 친구는 그 사이에 겪은 경험들, 생각들이 너무나 감탄스러운 멋진 청년이 되어있었다. 이렇게 멋진 녀석과 친구라는 사실이 좋기도 했지만, 왠지모를 그 묘한 기분이란. 2년만에 만난 은사님은 내게 여유를 가지라는 말을 거듭하셨다. 이미 주어진 것들만 해도 너무나도 풍요로운 것이라고..

인생의 단계마다 나름의 결심이 있었다. 수도권의 사교육에 공포감을 느꼈던 고등학교 입학때에는 '서울애들 보란듯이 이겨보자' 정도였던것 같고, 유학이라는 거대담론 앞에서 숨을 고르던 대학 입학때에는 '뭐든지 가능한 대학시기 알차게 보내자'였다. 군 입대 때에는 거창한 출사표인양 '태산은 흙을 사양하지 않고 큰 강과 바다는 물줄기를 가리지 않는다.'라는 사기 이사열전의 말을 인용했었고, 복학시기엔 '대학교 1,2학년때의 후회/아쉬움을 되풀이 하지 말자' 정도의 결심을 했다. 돌이켜보면 어처구니 없는 걱정이었던 것도 있고 민망한 과대포장도 있지만, 결국은 그 시기 나의 화두를 담은 결심들이었을 것이다.  


이제 박사과정을 시작한다.

매진과 여유는 언뜻 보면 서로 반의어 같지만, 분명 그 둘의 교집합이 존재한다. 열심이지만 그 이유가 집착이나 의무가 아닌 즐거움이라면, 마음의 넉넉함이 알뜰한 시간관리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게 바로 그 교집합을 찾은것 아닐까. 쉴 땐 친구와 영화도 보고 노래방도 가고 술한잔도 하면서 지낼테지만, 제대로 쉬지도 않고 멍하니 컴퓨터나 스마트폰 화면이나 쳐다보고 있는 시간은 만들지 않겠다는 얘기다. 놀거리마저도 없는 시간엔, 책을 펼치자. 그 책이 내 놀거리가 될 때 까지. 그게 내 박사과정에 대한 기억이 될 때 까지.

2013. 6. 7. 05:12

기숙사 방에서 숙제다 뭐다 해서 밤을 샐 때면, 밖이 밝아지는 것보다 새 지저귀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 아침은 눈이 아니라 귀로 먼저 찾아왔다. 새들은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아침 오는걸 알아채리는 걸까. 어쩌면 새들이 아침에 더 우는 것이 아니라 그저 새벽이 주는 고요함에 지저귐이 더 잘 들릴 뿐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아마 그 둘 다 일 것이다. 


늦은 숙제를 교수실 문 밑으로 밀어넣고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새벽을 시작하는 사람들에 무임승차해서 나도 슬쩍 그 상쾌함을 따라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새벽의 그 치열한 신성함 앞에 왠지 모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시차적응이 덜 되 새벽 세시에 깨버렸다. 멀뚱멀뚱 이불 밑에서 삼십분을 뒤척이다 결국 책을 한 권 펼쳤다. 오랜만에 읽는 한국어 소설이 반갑다. 그러다 유난히 선명한 뻐꾹- 소리에 창을 보니 하늘이 말갛게 밝아온다. 서로 듣고 박자를 맞추는 것도 아닐텐데, 십 여 분 간격으로 서로 다른 새들이 차례로 동참하더니 뭔가 협주곡을 듣는 기분이다. 그 소리에는 왠지 모를 청량감이 있다. 뻐꾸기가 아침을 알린다는 건 까치머리시절부터 알았지만 직접 내 귀로 듣는 건 아마 처음이었던 것 같다. 아니면 이제야 이 소리가 들릴 만큼 자란걸까. 기숙사에서 밤을 새며 익숙해진 그 소리와는 분명 다른 소리인데, 이건 다른 내 마음 가짐 때문이 아니라 진짜 다른 새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 공간'들에 붙일 표식지 종류에 새벽 새 소리도 추가해야할까보다. 


이번 여름에 뻐꾸기 소리를 꼭 들었으면, 그래서 오는 가을이 아침이면 좋겠다. 

2013. 5. 9. 23:55

2013/05/09


같은 수업을 듣는 친구를 우연히 만났는데, 그 친구가 물었다.

- Hey, how's your term project going?

Well, I am a graduating senior so I don't really care... what about you?

- you know, gain is always logarithmic

haha that's funny because I usually say the required effort is always exponential. The opposite way of saying the same thing.


그러고 헤어졌는데, 문득, 저 문장 하나에 서로 다른 삶의 태도가 드러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친구에겐 노력이 먼저고 결과가 그에 따라오는 것이라면, 내겐 결과가 먼저고 노력이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인가 보다. 물론 후자가 결과는 더 좋겠지만, 공부는 장기전인데, 그럼 전자가 좀 더 건강한 자세가 아닐까. 


물론 그 생각 후에 내린 결론 :

난 참 생각이 많다.


2012. 7. 27. 15:07

내가 다니는 학교의 10가지 졸업요건 중에는 수영시험이 있다. 수영장에 점프해서 입수한 후, 25야드 레인을 한번은 엎어져서, 한번은 뒤집어서, 그리고 아무 자세로나 한번 더 수영하면 되는 시험인데, 제대로된 자세일 필요없이 개헤엄이든 어떤 자세든 그저 가기만 하면 되는, 시간제한도 없는 시험이다. 처음 코넬을 가기로 결정하고 이 수영시험에 관한 글을 읽었을 때엔 (무늬만) 서울대 학생이었는데, 잠시 포스코 센터 수영 수업을 들을까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마냥 노느라 정신없던 시기라 고민만 하다 말았고, 결국 코넬 입학 후 주변 친구들 모두 수영시험치러 갈 때 난 멍하니 방에 있었던 것 같다.  

20살 그 때까지 나는 수영할 줄 모르는게 그렇게 이상한 건지 몰랐다. 생각해보니 태어나서 평생 수영장을 단 한번 갔었더란다 - 아마 초등학생때 였던거 같은데, 엄청 추워했던 기억, 그리고 거울 속 새파란 내 입술을 아주 신기해했던 기억이 난다. 게다가 우리 가족이 피서를 그렇게 많이 가는 편조차 아니었고, 모두들 바다보다는 산을 좋아했기 때문에 해수욕도 몇번 못해봤다. 말 그대로 '수영'이란 것을 접해본 적 조차 없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이 이상하다고는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한국에서는 수영에 대해 크게 얘기를 나눌 일도 없었고, 취미생활로 수영을 하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았기 (혹은 학창시절엔 다들 운동취미같은 사치를 부리지 못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게 웬걸, 미국에선 수영을 할줄 모른다니까 마치 나를 걸을 줄 모르는 사람 취급 하는 것이었다! 기분이 나쁘다기 보단 신기했다. 한국 친구들은 부산에서 고등학교 다녔다면서 어떻게 수영할 줄 모르냐며 핀잔이었고, 백인애들은 '아.. 그으래..?' 하며 의아해하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2007년 가을, 대학 첫 학기에 초급 수영 수업을 들었다. 다른 강의들 중간에 끼어있는 수영 수업은 너무나도 귀찮았고 (수업 전 수영복을 갈아입고 수업 후엔 샤워를 해야하고..), 수영 후의 강의시간엔 깨어 있었던 적이 더 적었던거 같다. 그래도 나름 열심히 수업 참여를 했는데, 돌이켜보면 평생 물에 떠보려고 한 적 조차 없는 사람이 일주일에 두 번 있는 수업 10주 했다고 해서 수영 시험을 치를 수 있는 수준에 이를 수가 없는 거였다. 운동신경이 뛰어난 친구들도 힘들텐데, 뛰어나기는 커녕 평범한 수준도 못되는 나로써는 택도 없었다. 수업을 듣고 수영 시험을 통과하는 친구들이 얼마나 멋지고 부러워 보이던지....

시험 통과를 못해도 수영 수업을 들으면 그 졸업요건을 만족시켜 줄 만도 하건만, 그런건 얄짤 없었다. 난 초급수업에서도 늘 가장 못하는 축에 속하는 나 자신을 보며 과연 수영시험을 언젠가라도 통과할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지만, 그땐 1학년이었으니까 그냥 막연히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2학년도 지나고, 군대를 갔다왔다. 복학 후 어쩌다 동생들이랑 (복학한지라 다들 동생들이니까..) 수영 얘기가 나오면 아직도 통과 못했다고 얘기하는 것이 은근히 뭔가 부끄럽더라.. 그치만 운동과 관련된 건 모조리 다 자신이 없는 터라 - 과연 연습한다고 내가 통과할 수 있는 수준이 될 수 있을까 - 라고 생각했기에 수업을 다시 들을 생각은 없었다. 덧붙여 앞서 말했던 대로 학기 중에 수영 수업을 듣는다는 건 너무나도 귀찮은 일이었으니까. 그렇다면 그나마 남아있는 해결책은 편법 뿐이었다. 백인들은 아시아인들을 외모로는 잘 구분해내지 못하고, 더군다나 시험중에 학생증 검사를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에 수영을 못하는 친구들은 할 줄 아는 친구에게 대신 시험을 쳐 달라고 부탁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최악의 경우엔 나도 그렇게 해야겠지... 정도의 생각을 했다. 


그러던 마침, 이번 여름을 학교에 남아 있기로 마음 먹으면서, 한번 더 수영 수업을 들어보기로 했다. 방학중이라 비교적 덜 귀찮을테고, 또 '수업'이 주는 강제성 덕분에 방학중에 꾸준히 운동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도 나도 사람인데 한번 더 들으면 통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그래도 나는 안될것 같다는 자기부정을 동시에 생각했던 것 같다. 게다가 알고 봤더니, 수업을 두 번 들으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해도 졸업요건충족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시험을 통과하든 못하든 어찌됬든 나는 편법이 아닌 떳떳한 방법으로 졸업요건을 채운 것이 되니까, 그걸로도 만족스러울 것 같았다.

5주 동안 화수목, 4시부터 5시 반까지의 수업이었다. 그래도 한번 수업을 들은 적이 있어서인지 이번에는 초급 수업 내에서 그나마 잘하는 편에 낄 수 있었다. 운동도 많이 되고, 조금씩 조금씩 실력이 느는게 느껴지면서 재미도 느꼈다. 2주차 쯤이 끝났을 때, 5년 전 수업을 다 듣고 난 직후 정도의 수준으로 회복한 것 같았다. 그럼 이제부터 진짜 연습 시작이겠지 - 한번씩 유튜브에서 수영강습 동영상을 찾아보기도 하고, 자기 전 침대에 누으면 수영 자세들을 이미지 트레이닝하면서 잠들고 그랬다. 하하. 게다가 수영장 개방 시간에 찾아가서 혼자 따로 연습까지 하고 했는데, 이게 왠걸, 도무지 늘지 않았다. 물흐르듯 부드럽게 하면 된다고 하지만 내 몸은 그렇게 부드럽지 않으니까.. 별다른 진전 없이 3주차, 4주차가 끝났고, 이번에도 이렇게 통과 못하고 수업을 마치나... 생각했다. 괜시리 안풀리는 다른 일들까지 함께 뭉쳐서 역시 나는 안되는 건가하는 말못할 패배감에 짜증스러웠다.

이번 화요일 수업이 끝나고, 한번 현실적으로 생각해봤다. 수업은 세번 더 남았는데, 그 사이에 실력이 충분히 늘 것 같진 않고, 하지만 느리게라도 늘고 있는 건 느껴지니까 조급해 하지 말자. 개학할때까지 아직 삼사주 더 남았고 그럼 수업 끝나도 꾸준히 와서 연습하다가 개학 직전 시험을 치면 붙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무리 내가 운동을 못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받아들이기로 했다지만 이렇게까지 하고도 수영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는 건 자존심에 상처이기도 했고, 덧붙여 그나마 요즘 생활에서 수영이 유일한 낙이었던 것도 계속 수영을 하고싶어 하게끔 했다. 학교에서 하고 있는 연구참여가 잘 풀리지 않는 덕에 현재는 답답하기만 했고, 게다가 다가올 가을학기의 숨가쁨과 대학원 지원의 부담감까지 컸던지라 눈 앞에 육체적 목적을 하나 만들어 놓으니 무언가 현실도피적 효과도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마음을 가볍게 먹고, 수요일 수업을 치르고, 오늘은 목요일이었다. 오늘 아침엔 연구실에 일찍 가야할 일이 있어 평소보다 많이 못자고 일어났는데, 감기에 걸린 건지 그저 비염이 잠깐 심해진건지 하루종일 재채기에 눈물 콧물만 잔뜩이었다. 그렇게 수영 수업시간쯤 되자 너무 피곤했다. 어짜피 오늘도 안될텐데, 그냥 집에 갈까. 어짜피 삼주 더 연습하기로 마음 먹었는데.. - 싶었지만, 수영장에 콧물 다 흘리는 한이 있더라도 가서 연습해야겠다는 마음으로 (^^) 수영 수업을 향했다. 얕은 물에서 한시간 정도 계속 연습하다가, 수영 선생님이 깊은 물에 점프해서 들어가는 연습이라도 하자며 깊은 풀로 이끌었다. 무서움은 이제 많이 없어져서 난 쉽게 점프했고, 그 모습을 보고는 선생님이 점프 후 자연스럽게 수영 자세로 이어지는 연습을 하자며 한 5미터 정도만 수영해서 앞으로 나아가서 멈춰 보라고 했다. 다시금 물에 풍덩 빠졌고, 수영하기 시작했는데, 한번 갈만큼 가보자 하는 생각에 계속 나아갔다. 죽죽 죽죽 - 아 이제 더 못하겠다 싶어서 덱을 잡고 물에서 나왔을 때, 눈 앞엔 5미터도 남아있지 않았다. 선생님은 보라고, 할 수 있다고, 조금만 더 나가면 해내는 건데 왜 멈췄냐면서, 한번 더 해보자고 하셨다. 화요일 수요일 수업때 한명 씩 이미 시험을 통과한터라 걔네들이 무지하게 부러웠는데, 막상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나도 해볼만 할 것 같았다. 숨을 고르며 잠시 쉬는데, 한 시간이 넘는 연습에 몸은 이미 녹초가 되어서 과연 할 수 있을까, 자유형으로 한 레인 했다고 해도 두 레인을 더 수영해야 되는데 이렇게 지쳐서 과연 가능할까 또 한번 나를 의심했다. 에잇, 뭐 안되면 멈추고 한번 더 남은 마지막 수업시간에 하면 되지, 오늘 이정도 한거 보면 적어도 화요일엔 눈 딱 감고 하면 통과하겠네 - 라고 가볍게 생각하기로 하고 다시 도전했다.

그리고, 통과했다. 세 레인을 마치고 났을 때의 그 성취감이란... 온 몸은 녹초가 되고 다리가 풀려서 그냥 털썩 수영장 바닥에 주저앉았지만, 결국 해냈구나 하는 성취감은 정말 짜릿짜릿했다. 같이 수업듣는 친구들 모두 축하한다며 하이파이브를 날렸고, 고맙다고, 웃으며 받아쳤다. 수영 후 샤워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지쳤지만, 기분은 너무 좋았다. 결국 해냈구나! 결국! 결국! 결국! 별로 늘지 않는다고 열심히 연습하지 않았으면 어떡할 뻔 했으며, 감기기운에 수영장을 안갔으면 어떡할 뻔 했으며, 지쳤다고 한번 더 시도해보지 않았으면 어떡할 뻔 했는가! 그래도 이번 여름, 여러가지 성취하고 해내는구나 싶어서 너무 뿌듯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니, 기분이 묘했다. 사실 마지막 레인에서 나는 다 도착한 줄 알고 (배영이라 얼마나 갔는지 제대로 안보였다) 멈춰 섰는데, 한 50센티? 정도 덜 도착한 상태에서 내가 일어선거였다. 한번만 더 팔을 저으면 닿는 거리였고, 아무리 지쳐있었다지만 한번 더 저을 수 있는 정도는 됬었기에, 그리고 수영 선생님도 그정도면 됬다고 해서 시험은 합격한 거였지만, 뭔가 마음이 사실 좀 찜찜했다. 남들에겐 가볍게 그냥 치면 되는 시험이었을지 모르지만 나로써는 너무나 큰 목표였기 때문에, 오히려 더 결벽스럽게 달성하고 싶었던 걸까. 괜시리 찜찜한 기분에 다음 화요일 마지막 수업에 다시 시험을 쳐서 제대로 채울까, 아냐 또 한번 더 하기엔 너무 힘들었어 - 이런 생각들이 머리 속을 둥둥 떠다녔다. 그래서 깔끔하게 마무리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계속 마음이 불편한가보다, 싶었는데, 사실 시간이 좀더 흐른 지금 생각해보면, 이 묘한 기분은 그것 때문만은 아닌거 같다.


현재의 답답함과 미래의 숨가쁨과 부담감. 눈 앞에 단기간의 작은 목표를 세워서 그걸 바라보며 저 거대담론들을 잊고 도피하려고 했나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버티지 못할 것 같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막상 생각보다 그 작은 목표를 빨리 달성하니까 기분이 불안한거다. 이제 뭘 붙잡고 버티지. 뭘 생각하며 저것들을 잊지.  

며칠 전 힐링캠프에선 안철수 교수가  안랩 초기시절의 일화를 말했다. 단 몇십원 정산이 맞지 않아 야근하며 장부를 정리하고 있는데, 순간 내 동기들은 지금 의대 교수하면서 인정받고 살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단다. 그 생각에 와르르 무너진 자신을 다시 세우는데 사흘이 걸렸다고 했다. 내가 군대에 있을 때, 상병이 되고 몇개월 후였나, 어느 한 날 동시에 고등학교 동기는 사법고시를 통과하고, 대학교 동기는 하버드와 예일 로스쿨이 붙어서 고민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던 것 같다. 나는 이곳에서 썩어가고 있는데 저들은 저렇게 성취하며 나아가고 있구나 - 현실에 대한 짜증과 답답함이 한꺼번에 몰려왔고, 그 슬럼프에서 벗어나오는데 나도 사나흘 정도 걸렸다. 다만 사나흘만에라도 그 함정에서 헤어나올 수 있었던 건, 중요한 건 나 자신이지 남과의 비교가 아니고, 나는 내 갈 길을 잘 가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나 자신을 충분히 믿을 수 있다면 지금 저들의 저런 소식에 내가 이렇게 속상해할리 없으니까, 결국 중요한건 얼마만큼 자기 확신을 가질 수 있느냐 인거다.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에 얼마나 확신을 갖고 얼마나 성실히 걸어가고 있는가 -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비로소 슬럼프에서 헤어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나 자신을 보며 괜히 스스로 많이 성숙했구나 싶어서 뿌듯해 했던 것 같다.ㅎㅎ

어떻게 보면 저 비슷한 슬럼프를 사나흘이 아니라 이번 방학 내내 앓아왔던것 같다. 이번엔 비교대상이 남이 아니라 내가 그렸던 허영스런 내 미래였지만, 그래서 오히려 헤어나오는데 더 긴 시간이 걸리나보다. 안철수 교수는 그런 슬럼프를 다시는 겪지 않기위해 크지 않은 작은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는 성취감에 의미를 찾았다고 했다. 지금 나에겐 수영이 그런 작은 목표였는데, 이제 끝났다. 그런데 그 성취감에 취해 있기에는, 작은 장애물로 어설프게 가렸던 압도적 현실이 다시 보이니까 두렵고 막막한거다. 

하지만, 언젠간 맞닥뜨려야 할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이루지 못 할 것만 같았던 수영시험마저 합격한(!!^^) 자신감으로 한층 더 무장했다. 작은 목표의 성취감이라는건 그 자체로써 보상이라기 보단 미래를 향한 벽돌같은 건가보다. 작은 벽돌들을 많이많이 모아야 집을 지을 수 있겠지.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다시 마음이 편해졌다. 


스무살 무렵, 친구들이나 동생들에게 항상 뭔가 대단한걸 이뤘던 적이 있는 것처럼 이런 말들을 하곤 했다. - 목표만 맹목적으로 보고 가는건 좋은 것만이 아냐, 막상 그 목표에 도달하면 내가 왜 이걸 이루고 싶어했는지, 여기에 도착해서 뭘 하고 싶어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거든. 그때 느끼는 허무함과 막막함이 오히려 더 힘든거 같애.. - 저런 염세적 생각에서 제대로 빠져나온건 군대를 갔다온 스물네살이 되어서였다. 아니, 다 정리됬다기 보단 감당하고 살아갈 수 있게 됬다고나 할까. 그 허무와 막막을 겁내며 목표를 만드는 것을 두려워 하는 건 그 목표를 마치 인생의 최종 도착지인양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 목표들은 사실 인생의 중간과정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그러면서도 무의미하고 불가치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런 중간걸음 하나하나에서 의미와 재미를 찾다 보면, 아쉬울 순 있어도 후회는 없을 최종 도착지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한 계단 오른 기쁨과 다음 계단을 바라보는 기대감을 늘 함께 가진다면, 그러면서도 그것들이 그저 몇 개의 계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다면, 나아가는 한걸음 한걸음은 설레면서도 담담하고, 무겁지만 가볍고, 겁이 나지만 여유있는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뭐니뭐니 해도, 제일 중요한 건 내 마음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엔 사나흘이 아니라 서너시간만에 슬럼프를 딛고 나온거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헤헤. 그나저나 나도 참, ㅎㅎ '고작' 수영시험 하나로 생각이 이리도 많다 ㅋㅋ 쓸데없이~

2012. 5. 29. 15:30

돌이켜보면 올해 겨울은 유난히 길었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1월은 영하 20도를 밑도는 지독한 추위였어요. 하지만 그것도 며칠, 2월이 채 되기도 전에 포근한 날씨가 찾아왔지요. 이타카의 겨울이라기엔 너무 따뜻했던지라 지구 온난화에 대한 괜한 걱정과 이른 봄에 대한 섣부른 기대감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맞이한 3월 말 봄방학은 마치 초여름 같았어요. 이른 봄꽃이 만개하고, 저도 여름옷을 꺼내고 겨울옷을 정리해 넣었습니다. 하지만 좋았던 날씨도 일주일 남짓, 다시 찾아온 추운 날씨가 4월 말까지 이어지더군요. 중간에 봄같은 며칠이 한두번 있었지만, 금새 다시 추워졌어요. 가짜 봄에 속아 꺼냈던 여름옷은 그때까지도 입지 못했고, 정리했던 겨울옷들은 고민고민하다 다시 꺼내 입고 그랬습니다. 아직도 입고있는 두꺼운 파카가 어찌나 무겁던지요... 그래도 크게 불평하지 못했던 건, 그 가짜 봄에 저와 함께 속았던 봄꽃들 때문이었을 겁니다. 만개했다가도 다시 얼어붙어 어지러이 떨어져버린 꽃들이 어찌나 처량해보이던지... 어디 숨지도 못한채, 찾아오는 날씨를 그저 온몸으로 받아내는 나무들의 모습에선 숭고함마저 느껴졌습니다. 속으로 - 제대로 안추웠던 대신 얇고 길게 춥구나 - 그럼 설마 5월까지 추운건 아닐까 걱정했지만, 그래도 다행이었던건 결국엔 봄이 찾아왔다는 사실이었죠.

돌이켜보면 제 지난 5년도 그랬던것 같아요. 고등학교 졸업 후 미국 출국 전 까지의 여행같았던 시간들, 짧았지만 지독했던 미국에서의 첫 1년, 그리고 이어진 얇고 길었던 못난 시간들. 봄방학처럼 중간중간 이제 봄인가 헷갈렸던 시기들도 있었지만, 다 가짜였어요. 그런 짧은 가짜 봄이 끝날때마다 추위는 늘 돌아왔고, 그래서인지 어쩌면 다시는 봄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던것 같네요. 어리석게도 말예요.


그렇지만, 봄이 왔어요. 

그리고 겨울 이후의 모든 봄이 그런 것처럼, 너무나 마법같습니다.

기다리는 연락도, 반가운 전화도 없었기에 늘 무음으로 놔두었던 휴대폰을 진동으로 바꿨어요. 잠결에 들리는 진동소리가 이젠 짜증스럽지 않고 반갑기만 합니다. 100개도 채 쓰지 못하던 문자는 1000개 요금제로 바꿨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문자부터 보내게 되네요. 별다른 추억 없이 공부한 기억으로만 가득찬 대학생활이 될 줄 알았는데, 지난 한 달 간의 추억이 그 전 3년간의 추억보다 더 많아요. 캠퍼스에 피는 벛꽃이 이렇게 이쁜지도 몰랐고, 조금만 학교를 벗어나면 볼 수 있는 이쁜 공원과 맛있는 식당들도 졸업 전에 가보게 될 줄 몰랐습니다. 제 마음 속 꽃들이 너무 오래 피지 못해 다 없어졌는줄 알았는데, 봄을 맞아 활짝 폈어요. 


그리고 이젠 여름이네요. 

마법의 봄을 시기하듯 쏟아지는 따가운 햇빛은 사실 더 큰 열매를 맺기 위한 과정이라고들 얘기합니다. 얼마나 긴 여름일지 모르지만, 이 여름도 아마 그런 의미일 거에요. 그렇지만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여름의 끝엔 낙엽이 지는 가을도, 얼어붙는 겨울도 없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2012. 1. 19. 07:46
2011/12/17~2012/01/07

간략한 여행과정과 생각들.

12/17 출국
금요일 자정까지 마감이었던 페이퍼를 11:52분에 제출하고, 성급히 (근3일만의) 샤워를 하고 방정리, 짐싸기 끝에 1시 버스를 타고 여행을 시작했다. 9시 뉴욕발 비행기를 타고 달라스 환승 후 오후 5시경 멕시코 시티 도착. 공항을 둘러보며 기다리다 8시에 도착한 친구와 함께 도심으로 들어갔다. 일본인 호스텔 까사 아미고 Casa Amigo에 도착하니 어느덧 10시. 씼고 잤다.

12/18 멕시코 시티 - 소칼로 Zocalo, 투우
소칼로 - 광장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 주변을 둘러보고, 투우경기를 보러 갔다. 실제로 본 투우는 매우 잔인했고 어린이가 보기에는 교육적으로 안좋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호방한 자태와 걸음걸이를 뽐내며 걷는 투우사의 모습은 같은 남자가 봐도 넘치게 섹시했다. macho란 무엇인가 제대로 보여주는 그 모습. 그 긴 칼을 소의 목에 단번에 푹 꽂아넣는 장면에선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러버렸다.

소칼로 성당

지하철역에서

투우경기장


 12/19 멕시코 시티 - 멕시코 가짜 학생증 만들기, Zona Rosa, 우남대학 UNAM,  
가짜로 멕시코 대학의 학생인양 학생증을 만들었다. 국제학생증은 별다른 혜택이 없는 대신, 멕시코 자국의 대학생에게는 12월 동안에는 버스비가 반값이었고, 거의 모든 유적지나 박물관 출입이 무료였다. 교환학생인척 학생증을 만들고 여행내내 정말 잘 썼다. 우남대학은 학생이 30만명에 이른다는, 중남미 최대, 최고의 대학이다. 하나의 대학이라기 보다는 대학도시와 다름 없는 곳. 월요일 대부분의 관광지가 열지 않길래 대학을 찾았다.

중앙도서관 앞에서


12/20 멕시코 시티 - 테오티우아칸 Teotihuacan, 소칼로, El Cardenal, Ballet Folclorico de Mexico
여행지를 멕시코로 정한건 순전히 어느 블로그에서 읽은 한 문장 때문이었다. - 멕시코 피라미드를 보면 페루 마추픽추는 그냥 '산성'수준에 불과하다. 세계에서 3번째로 큰 피라미드라는 테오티우아칸은 듣던대로 거대했지만, 사실 나와 내 친구에겐 그냥 언덕 정도로 밖에 다가오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요르단 페트라에서 느꼈던 웅장함을 바랬었는데, 허허벌판에 그냥 피라미드 하나 달랑 있어서였을까. 이번 멕시코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것이 유적이었는데, 사실 돌이켜보면 유적보다 도시들이 훨씬 더 좋았다.

테오티우아칸 방문 후 다시 소칼로를 돌아보고, 저녁은 El Cardenal이라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여행책에 최고급 레스토랑으로 표시된 곳이었지만, 싼 물가 덕분에 크게 부담스럽지 않았고, 그래서 이후의 거의 모든 도시에서도 한번씩은 최고급 레스토랑을 갔다. 이탈리와때와는 다른 럭셔리한 음식에 스스로 감탄하곤 했다.
식사 후엔 그 부근을 또 걷고 돌아다니다가 멕시코 민속춤을 소재로 만든 발레 공연을 보러 갔다. 50년대 어떤 전설적인 안무가가 창안한 공연인데, 이제는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공연하는 멕시코의 대표적 문화상품이 되었다고 한다. 멕시코 내의 다양한 지역과 부족들, 그리고 아즈텍, 마야 시절부터 스페인 식민지, 독립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와 문화가 하나의 공연 안에 녹아들어 있었다. 화려한 색의 드레스와 멕시코 만의 독특한 느낌이 듬뿍 담긴 공연이었고, 멕시코시티를 누군가 간다면 꼭 보라고 권하고 싶다. 

테오티우아칸 방문 전날 구입한 선글라스와 모자. 합쳐서 9천원 정도 들었다^^

마지막 점프 사진 ㅎㅎ

테오티우아칸 - 오른쪽 상단의 일명 태양의 피라미드가 세계에서 3번째로 큰 피라미드란다

Restaurante El Cardenal

Ballet Folclorico de Mexico


12/21 멕시코 시티 - 과달루페 성당 Basilica Guadalupe, 차뿔떼뻭 공원 Chapultepec, Mi Gusto Es
멕시코는 천주교가 지배적인데, 그 계기가 된 사건이 어느 원주민 청년이 성모 마리아를 만났던 사건이었다고 한다. 어느날 멕시코시티 근교 언덕에서 한 청년에게 성모가 나타나 이 곳에 성당을 지어달라고 하였는데, 당시 멕시코 주교와 모든 사람들이 그 청년의 말을 믿지 않았다가, 네번째인지 세번째인지 성모님이 나오셨을때 그 성모의 모습이 청년이 입고있던 망토에 그대로 새겨졌다고 한다. 그 망토를 보고서야 비로소 사람들은 그 청년의 말을 믿었고, 성당을 지었다. 그런데, 독특한 점은 그 성모의 피부색이 검은 색이었다는데 있다. - 1531년 나타나신 성모가 교황청으로부터 인정받은건 1754년이고, 그 청년(후안 디에고)가 성인으로 추대된건 2002년이다. 여러가지 과학적 조사에 따르면 500여년에 걸친 세월동안 색은 전혀 바래지 않았고, 붓질의 흔적이 없으며, 성모의 동공을 2500배로 확대하자 성모를 보고있는 후안 디에고의 모습이 동공에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12/22 산 미구엘 San Miguel de Allende - 성당 La Parroquia
휴양지가 아닌 도시 중에서 미국이들이 가장 많이 찾는 도시라는 산 미구엘. 산 미구엘은 선교사 이름이고 그의 아들 이름이 아옌데인데 아들은 스페인과의 독립에서 큰 역할을 했었다고 한다. 멕시코인들이 독립전쟁에 대해 엄청난 자부심을 갖고 있는 걸까. 아옌데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독립의 영웅들의 이름을 붙인 도시나 도로가 정말 많았다.  
멕시코의 식민도시들은 각 도시마다 특유의 색감이랄까, 그런게 있었는데, 이곳은 분홍색이었다. 분홍 석회석(?)으로 지어진 성당과 분홍빛 및 다른 원색들로 색칠된 집들, 벽들 - 이쁘고 아기자기한 도시의 모습을 보면 왜 이곳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인지 알 수 있다.

일명 웨딩케익 성당

흔한 식민지 도시의 거리

그루폰으로 구매한 호텔에서


12/23 산 미구엘 - El Ten Ten Pie,
과나후아토 Guanajuato - 과나후아토 대학, 엘 피피라 El Pipila 동상, 후아레즈 극장 Teatro Juarez, 까예호네아다스 Callejoneadas
최고의 도시는 과나후아토였다. 대학도시 특유의 생동감, 산 미구엘보다 조금 더 큰 규모, 산등성이 걸쳐서 펼쳐진 집들, 꽤 있지만 너무 많지는 않은 여행객 - 아름다운 유럽의 어느 도시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도시였다. 언젠가 아내와 다시 한번 와 보고 싶은 곳이랄까.ㅎㅎ 까예호네아다사는 전통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전통 노래와 악기를 연주하며 도시 곳곳을 함께 돌아보는 거였는데, 아.... 스페인어를 모르고 간게 정말 아쉬웠다.

El Pipila 동상 앞에서, 도시의 전경

El Pipila - 스페인군이 과나후아토 성 안에서 농성하던 때 성문에 불을 질러서 독립군을 들여보낸 영웅

과나후아토의 전경 : 낮

과나후아토의 전경 : 저녁

과나후아토의 전경 : 밤

까예호네아다스

2011. 12. 3. 17:25

금요일 밤, 놀기도 싫고, 공부하기도 싫고, 졸립긴 하고 - 푹 자고 일어나 일찍 하루를 시작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10시에 잠에 들었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왠걸, 새벽 2시다. 너무 불규칙적으로 살아서 몸이 이 시간을 낮잠으로 생각한 걸까. 허탈한 마음에 책상에 앉았다.

추수감사절 연휴 이후로 일주일정도 마음을 잘 못잡았다. 옛 친구들과의 만남은 언제나처럼 반가웠지만, 덕분에 현실을 잃고 과거 속에서 한동안 허우적거렸다. 한가지 생각했던건, 내게 가장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준 사람들도 그 추억이 스스로의 가장 아름다운 추억일 필요는 없다는 거다. 서로가 같다면 더할나위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그 추억이 바래는 건 아니다. 그 사람의 가장 아름다운 추억 속에 자리잡은 사람들에게 약간의 묘한 질투심을 느끼는 거야 어쩔 수 없다 해도, 그래도 결국은 고마운 마음이 앞선다. 언제나 돌아가면 집에 온 것만 같은 포근함을 느끼게 해 주는 그들 - 기억할만한 기억을 만들어 줘서, 정말 고맙다.

복학하고 한동안 글을 쓰지 않은 건, 쓸 거리도 쓰고 싶은 마음도 없어서였다. 군대에서의 경험덕인지 예민했던 내 감수성이 많이 가라앉았고, 그런 마음상태가 너무 좋았다. 똑같이 큰 돌이 날라와도 이제는 고요하게만 일렁이는 감정들이 무척이나 대견스러웠는데 - 이제와 느끼는 건 그저 진폭을 삼킨 것일 뿐, 다 어른인 척 굴었을 뿐이라는 거다. 개뿔. 결국은 너나 나나 다 그대로인데, 연기가 늘었을 뿐인거야. 물론 그런게 어른인 거겠지만. 출사표 마냥 던졌던 입대 전 다짐들도 현실 속에서 많이 희석되었는데, 그래도 내 가슴속 어딘가에 남아서 나란 사람의 채도를 변하게 했을테니까, 그리고 그렇게 성장해 가는 걸테니까. 그래, ㅎㅎ 군대 안갔다온 애기들이 뭘 알겠니ㅎㅎ - 그리고 나는 뭘 쥐뿔이나 알겠니ㅎㅎ

이제 남은건 시험 둘과 페이퍼 둘. 이제까지 중에서 최악의 학점이 기대되는 와중에 (복학의 여파라기 보다는 골랐던 수업들이 어려운 것들이라서라고 믿고 싶은...) 마지막 최선을 다해봐야지..?

2011. 8. 17. 02:16

2009. 09. 14 ~ 2011. 07. 10

하나. 서론
전역하면 꼭 군 생활을 정리하는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복무 기간 동안 새로운 경험이나 느낌을 받을때면 그 내용을 꼭 머리 속에, 그리고 수첩 속에 갈무리 하곤 했다.


둘. 군생활은 정말 잃어버린 시간일까?
드디어, 마침내, 비로소, 전역했다. 결국은 나도 저러한 접두어를 쓰며 제대를 묘사할 수 밖에 없다. 지난 2년이 온전한 낭비와 잃어버린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학생으로써의 2년에 걸맞는 생산성을 지닌 시기는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군생활 후반부쯤부터 미필인 사람들에게 여러번 말하곤 했다. - 군대, 와서 배우는 것도 많으니까 굳이 억지로 안올 것 까지야 없지만, 그래도 합법적인 절차로 안올 수 있다면 안오는 것이 낫다고.

회한스럽게 시작했지만 ㅎㅎ 물론 말했던 것처럼 아무 의미 없는 시간은 아니었다.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군생활은 바닥에서 꼭대기까지 남은 평생 겪을 조직생활을 2년이란 기간에 압축해서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과학고와 유학생이라는 지엽적인 경로로 살아왔던 입대 전 5년 가량의 시간동안 잊었던 보통다수의 삶에 대해 다시금 피부로 느끼는 경험이기도 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우리 아부지와의 절대적 공감대가 하나 더 형성되었다는 사실이 제일 반가웠다.


셋. 천안함과 연평도.
내가 직접적으로 그 현장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군인의 신분으로 천안함 피격과 연평도 포격을 겪은 것은 분명 남다른 경험이었다. 천안함때 느꼈던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어찌나 내 속이 상하던지, 답답한 현실은 눈물을 흘리기에도 부끄러웠다. 하나하나 나열하면 끝이 없다.

특히나 연이어 벌어지는 논란에 속터지게 답답했다. 그 어느 증거와 정황을 떠나서, 우리나라 해역에서 우리 함정이 두 동강 났다면 일단 북한부터 의심해야 하는 것 아닐까? 어느 정황도 100% 확실하게 북한의 소행임을 보여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다른 원인이라는 증거도 명백하지 않다면 일단 북한부터 의심해야 하는 것 아닐까? 나는 실제로 정부의 조사 결과와 발표가 틀렸다고 할지라도 그 것이 북한의 공격이라고 결론지은 정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틀림이 실수가 아니라 고의적인 것이었다면 나도 경악하겠지만, 나는 다시금 똑같은 상황이 온다고 해도 또 속겠다. 0.01%로 되지 않을 가능성을 염려하며 우리나라 정부를 불신하며 살 수는 없다. 첨언하자면, 한편으론 그런 음모론적 의견도 마음껏 개진하는 모습을 보며 기쁘기도 했다 - 이정도까지 표현이 자유로운 세상이 되었구나! - 하지만 0.01%의 가능성이라면 국민의 0.01% 정도가 그런 의견을 개진하는 게 표현의 자유지 그의 천배 만배 되는 사람들이 정부를 의심한다면 그것 또한 잘못된 일이다.

전투 중에 전사한 해병대 장병들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저런 논란 때문에 연평도 포격은 사실 전화위복인 면도 있었던 것 같다. 그 일 이후로 아무도 이제 북한이 우리의 적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직접 겪지 못했기에 과거의 군사정권에 대해 큰 거부감이 없는 현재의 10대, 20대들이 오히려 30대보다 더 투철한 안보의식 - 혹은 북한에 대한 적대의식 - 을 가지고 있다. 나도 그 세대의 구성원이고.

훈련소에서 '진군가'라는 군가를 처음 배웠을 때 그 가사 - 백두산 까지라도 밀고 나가자 - 에 조금 놀랐었다. 아직도 북한에 대해 '밀고 나가자'라는 표현을 쓴다는 사실이 훈련소에선 그렇게 민감하게 다가왔는데, 군생활 하면서 내가 쇄뇌당한걸까? 지금 보기엔 당연한 가사인 것만 같다. 어찌됬든 총칼을 겨누고 서 있는 것이 현실이다. 북한 주민은 아닐지 몰라도 엄연히 북한이라는 국가는 우리의 적이다. 맞다. 둘 다 총을 내려놓고 얼싸안으면 조국의 통일이 다가올 것이다. 그런데, 서로가 조금씩 양보하여 결국은 모두가 최고의 이익을 얻는 게임이론적 평화를 주장하기엔 내 목숨은 한 개 뿐이고 너무 소중하다. 그래서 내가 먼저 총을 내려놓진 못하겠다.


넷. 군생활은 힘들다. 
나의 군생활은 밖에 나와서 자랑할만큼 대단하거나 힘들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어디가서 부끄러워할만큼 시시하거나 쉬웠던 것은 아니었다. 허나 어찌됬든 군생활은 힘든 것이다. 해병대건 행정병이건, 전방이건 후방이건, 육군이건 카츄사건, 현역이건 산업체건, 군생활은 힘들다. 결국 힘든 건 노동의 강도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동기부여의 정도에서 비롯한 것이기 때문이다. 군복무에 대해서 만큼은 내가 선택해서 하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국가제도의 폭력적 강제성에 휘둘려서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그 순간 아무리 할만한 일과 훈련이더라도 진절머리나는 가혹행위가 되고 만다. 반복되는 일상이라는 마취제 덕에 그 사실을 잊고 2년간의 군생활을 버티어 내지만, 그래도 한번씩 마취가 풀릴때면 분통터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나는 유난히 사소한 의미에 민감하고 섬세한 면이 있다. 전역하고 집에 돌아온 첫 날, 밤 늦게 농협을 갔다. 밤 10시에, 반바지를 입고, 쪼리를 신고, 집 밖으로, 어머니와 함께, 나서는 순간 - 눈물이 날 뻔 했다. 아, 나 이제 진짜 전역했구나. 이제 나는 내가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입고 싶은 옷을 입고, 나가고 싶을 때 나갈 수 있다. 박탈된 자유의 복권. 저 지극히도 당연한 것들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하다못해 채식홍보 켐페인단의 서명부탁도 거절했던 나였는데, 이제 지하철 역에서 국제 앰네스티 활동에 서명을 추가할 수 있는 어엿한 민간인이 된 것이다. 개인이 아닌 부분이 되어 스스로의 (이른바) 정치적 정체성을 잃고 복무했을 전의경들이 특히 저런 부분에선 전역후 감회가 새롭지 않을까.


다섯. 어머니
아무리 군대가 편해지고 짧아졌다고 한들 그래도 여전히 군대라는 곳은 남자들에게 어머니의 사랑을 새삼 느끼는 계기임에는 틀림없다. 오히려 직접 겪어서 그 곳도 사람 사는 곳이라는 것을 아는 아버지보다, 부풀고 과장된 소문들로만 군대를 접한 어머니에게는 아들의 입대가 그리도 무거운 일인가 보다. 훈련소 바리케이트 너머로 내 손을 끝끝내 놓치 못하시던 어머니의 손길, 그리고 첫 휴가때 터미널에서 나오는 나를 보며 안절부절 못하시던 어머니의 눈빛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내가 정녕 누군가에게 이리도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던가. 그 손길과 눈빛을 떠올리면 두고두고 부끄럽고 겸손해질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여섯. 돌이켜보면.
전역한 지금에 이르러선 대학교를 1년만 마치고 바로 군대를 갔다오지 않은게 아쉽다. 어짜피 할 거라면, 가능한한 빨리 할걸.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데, 군복무는 어찌 보면 대한민국 국적의 남성이 날때부터 갖고 태어나는 원죄같은 걸지도 모른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하고, 어짜피 받을 벌이라면 빨리 받는 게 좋다. 자랑스런 국방의 의무를 죄에 비유하다니 국방부와 기무사에서 이 글을 보면 천인공노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쩔꺼야? 난 이제 민간인인데.


일곱. 결론
어쨌든 군생활이라는게 이 글의 제목처럼 반점하나 찍고 숨 한번 돌리지 않고서는 말 할 수 없는 경험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내 가장 최근 2년이니까 별 수 없겠지. 그것이 허송세월이었을지 알찬 시간이었을지 군생활의 의미에 관한 길고 긴 탐색 끝에 내가 얻은 결론은 하나였다. - 어떻게 보낸 시간인들, 20대에 의미없는 2년이 어딨겠는가? 

각설하고 지금까지의 글이 너무 길었다면 이 한 문장만 읽으면 된다. 
- 안녕하세요~ 대한민국 육군 예비역 병장 윤종민이에요~
그리고 이 글의 독자 중에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군복무 해결에 대해 고민중인 군미필자에게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 생각하지마. 그냥 지금 입대해. 그것이 정답.





그리고 나의 군생활을 위로해준 문화적 존재들에 대한 내맘대로 Top List.

1. 최고의 작가 : 김훈
칼의 노래, 남한산성도 좋았지만 뭐니뭐니해도 압도적이었던건 2004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그의 중편 [화장]. 살을 에는 잔혹함에 그가 괜히 손꼽히는 작가인게 아니구나 싶었다. 마찬가지로 박완서님도 경탄스러웠고.

2. 최고의 단편 : 구효서, [밤이 지나다] - 2004년 이상문학상 우수상
객관적 탁월성은 [화장]이었다면 나의 주관적 최고작은 이 단편이었다. 서정적 아름다움과 공허함, 욕망, 혼란. 그냥 읽어봐ㅎㅎ 그 외엔 신경숙 [지금 우리 곁에 누가 있는 걸까요], 권지예 [꽃게 무덤], 이혜경 [그리고 축제]

3. 최고의 책 : 로마인 이야기
카이사르는 정말 압도적 영웅이었다.

4. 최고로 힘들었던 책 :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1300쪽이 넘는 책을 감히 영어로 읽겠다고 덤비다니. 결국 다 읽었지만 정신력 소모도 컸다 ^^

5. 최고의 가수 : f(x)
NU ABO부터 좋았다. 그냥 '꿍디꿍디'에 팍 꽂혔고 피노키오에서도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징징윙윙'이라고 노래불러 주었다. 포스트모던한 가사와 멜로디의 선구자!

6. 최고의 노래 : SanE, LoveSick
봄날의 감성힙합. 들을 때마다 첫사랑이 생각나던 노래. 아쉽게 2위한 노래는 UV의 [쿨하지 못해 미안해]

7. 최고의 드라마 : 로열 패밀리
따로 쓴 리뷰를 참조하세요~

8. 최고의 여배우 : 김태희
아이리스도 재밌긴 했지만 군인에게 최고는 역시 마이 프린세스였다. 발랄한 그녀의 모습은 새로운 신세계(?!)를 나에게 열어주었다. 십몇화가 넘어가면서 드라마 내용이 산으로 갈때마다 그만 볼까 싶다가도 그냥 태희누나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는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 소름끼치게 이쁘다. 태희누나 사랑해요 히히

9. 최고의 광고 : 두산, 서점편
한번씩 나 자신이 의심스러울때면 생각날 것 같다. 볼때마다 울컥울컥했던 광고. 다음에 따로 올리겠다.
2009. 11. 20. 19:07

어쩌다 보니 저는 강원도 인제까지 와버렸습니다.
한 번 하는 군생활인데 인제정도는 되야 되지 않겠습니까ㅎㅎ
조금 추운거 제외하면 정말 생각한거 이상으로 너무나 편안하게 살고 있습니다.
(이등병이 인터넷을 쓰고 이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도 정말 놀랍습니다!)

개인적 연락을 못하는 건 이해해주세요.
마음편히 쉬고 있습니다.
모두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