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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5. 29. 15:30

돌이켜보면 올해 겨울은 유난히 길었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1월은 영하 20도를 밑도는 지독한 추위였어요. 하지만 그것도 며칠, 2월이 채 되기도 전에 포근한 날씨가 찾아왔지요. 이타카의 겨울이라기엔 너무 따뜻했던지라 지구 온난화에 대한 괜한 걱정과 이른 봄에 대한 섣부른 기대감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맞이한 3월 말 봄방학은 마치 초여름 같았어요. 이른 봄꽃이 만개하고, 저도 여름옷을 꺼내고 겨울옷을 정리해 넣었습니다. 하지만 좋았던 날씨도 일주일 남짓, 다시 찾아온 추운 날씨가 4월 말까지 이어지더군요. 중간에 봄같은 며칠이 한두번 있었지만, 금새 다시 추워졌어요. 가짜 봄에 속아 꺼냈던 여름옷은 그때까지도 입지 못했고, 정리했던 겨울옷들은 고민고민하다 다시 꺼내 입고 그랬습니다. 아직도 입고있는 두꺼운 파카가 어찌나 무겁던지요... 그래도 크게 불평하지 못했던 건, 그 가짜 봄에 저와 함께 속았던 봄꽃들 때문이었을 겁니다. 만개했다가도 다시 얼어붙어 어지러이 떨어져버린 꽃들이 어찌나 처량해보이던지... 어디 숨지도 못한채, 찾아오는 날씨를 그저 온몸으로 받아내는 나무들의 모습에선 숭고함마저 느껴졌습니다. 속으로 - 제대로 안추웠던 대신 얇고 길게 춥구나 - 그럼 설마 5월까지 추운건 아닐까 걱정했지만, 그래도 다행이었던건 결국엔 봄이 찾아왔다는 사실이었죠.

돌이켜보면 제 지난 5년도 그랬던것 같아요. 고등학교 졸업 후 미국 출국 전 까지의 여행같았던 시간들, 짧았지만 지독했던 미국에서의 첫 1년, 그리고 이어진 얇고 길었던 못난 시간들. 봄방학처럼 중간중간 이제 봄인가 헷갈렸던 시기들도 있었지만, 다 가짜였어요. 그런 짧은 가짜 봄이 끝날때마다 추위는 늘 돌아왔고, 그래서인지 어쩌면 다시는 봄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던것 같네요. 어리석게도 말예요.


그렇지만, 봄이 왔어요. 

그리고 겨울 이후의 모든 봄이 그런 것처럼, 너무나 마법같습니다.

기다리는 연락도, 반가운 전화도 없었기에 늘 무음으로 놔두었던 휴대폰을 진동으로 바꿨어요. 잠결에 들리는 진동소리가 이젠 짜증스럽지 않고 반갑기만 합니다. 100개도 채 쓰지 못하던 문자는 1000개 요금제로 바꿨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문자부터 보내게 되네요. 별다른 추억 없이 공부한 기억으로만 가득찬 대학생활이 될 줄 알았는데, 지난 한 달 간의 추억이 그 전 3년간의 추억보다 더 많아요. 캠퍼스에 피는 벛꽃이 이렇게 이쁜지도 몰랐고, 조금만 학교를 벗어나면 볼 수 있는 이쁜 공원과 맛있는 식당들도 졸업 전에 가보게 될 줄 몰랐습니다. 제 마음 속 꽃들이 너무 오래 피지 못해 다 없어졌는줄 알았는데, 봄을 맞아 활짝 폈어요. 


그리고 이젠 여름이네요. 

마법의 봄을 시기하듯 쏟아지는 따가운 햇빛은 사실 더 큰 열매를 맺기 위한 과정이라고들 얘기합니다. 얼마나 긴 여름일지 모르지만, 이 여름도 아마 그런 의미일 거에요. 그렇지만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여름의 끝엔 낙엽이 지는 가을도, 얼어붙는 겨울도 없을 거라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