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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에 해당되는 글 6건
2009. 6. 15. 04:29
연극 코펜하겐
2009. 06. 04. 목요일 저녁 8시 두산 아트센터
마이클 프레인 작
윤우영 연출
남명렬, 이상직, 김호정 출연

사용자 삽입 이미지

덴마크의 물리학자 닐스 보어와 독일의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는 절친한 동료이자 사제지간이었지만,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독일은 덴마크를 점령하고 둘의 관계는 소원해진다. 그런 상황의 어느날, 하이젠베르크가 보어의 집을 방문하는데...


하나. 과학연극
두산아트센터 과학연극시리즈의 세번째 작품이다. 처음 '과학연극'이라는 문구를 보고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던 기억이 난다.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연극인 이상 연극 속에 등장하는 과학은 어디까지나 소재이고 매개체일 뿐 연극의 목적 자체는 물론 아니지만, '과학연극'이라는 표현에서 일반 대중은 얼마나 큰 거리감을 느낄까. 막연한 거부감 내지는 아동용 교육 연극일거 같다는 느낌을 가질 것만 같다.


둘. 물리학
관극하기 전 과연 전문적인 핵물리학에 관한 내용을 일반 관객에게 어떻게 풀어서 설명할까에 대해 많이 궁금했다. 극에서는 보어와 하이젠베르크뿐만 아니라 보어의 부인인 마가레트도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보어와 하이젠베르크는 대화 중간중간 물리학자가 아닌 마가레트에게 내용을 좀더 쉽게 풀이해서 설명해준다. 이것이 바로 관객이 극 속 물리학적인 내용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효과적인 장치 역할을 한다. 이러한 장치는 극의 전반부까지는 매우 효과적으로 작용했는데, 아마 전반부에서는 핵물리학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는 관객도 충분히 내용을 따라 갈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후반부에서는 좀 더 복잡한 내용들이 좀 더 빠른 속도로 쏟아져 나왔다. 좀 더 빨랐으면 나도 숨이 찼을 것 같은 속도였으니까 일반 관객들은 꽤나 많이 당황했을 것 같다. 지나친 부연설명이 극의 긴장감을 떨어뜨린다는 걸 생각하더라도, 조금은 아쉬운 부분이었다. 

아마 연극 배우들도 이런 대사는 평생 해본 적 없었을텐데, 그래서인지 내가 본 연극 중 배우의 대사 실수가 가장 많은 연극이었다. ^^


셋. 미필적 고의
중2때였나, 로빈 쿡의 의학소설을 처음 접했을 때, 그의 책 중에 '미필적 고의'라는 제목을 가진 책이 있었다. 있어보이는 단어에 신기해하며 무슨 뜻인가 일부러 찾아봤던 기억이 있는데, 연극을 보고 오랜만에 그 단어가 떠올랐다.

연극이 다루고 있는 좀 더 깊이 있는 주제라면 인간과 세상의 불확실성/임의성과 같은 얘기들도 할 수 있겠지만, 나름 과학에 몸담고 있는 나로써는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연극의 주제만해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물리학자에게 원자력을 연구할 윤리적 권리가 있는가?] - 아마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이후의 수많은 물리학자들이 고민했을 문제일 것이다. (직접적으로 원폭 개발에 최선을 다한 맨하탄 프로젝트같은 경우를 제외한다면) 물리학 자체는 물론 가치중립적이지만, 새로이 발견하고 개발된 기술과 원리들이 악용되어 윤리적으로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을 이제 과학자들은 직접적으로 느끼고 있고, 또 느껴야 한다. 악용될 가능성 때문에 새로이 개발될 기술의 긍정적인 면을 포기해서도 물론 안되겠지만, 최선을 다해 그 악용될 소지를 없애고 줄이려는 노력을 기울어야 할 것이다. 악용될걸 알면서도 - 그정도는 어쩔 수 없는 거잖아 - 하는 마음가짐이라면 과학자들에게 미필적 고의를 물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그정도로 최전선의 학문에 서게 될 지는 모르겠다만 (^^) 그렇게 된다면 아마 두고두고 나를 괴롭힐 문제가 될 것 같다.


넷. 두산아트센터
나는 대기업이 이런 식으로 문화 사업에 돈을 붓는 것에 대해 대환영 한다. 건물도 멋지고, 내부공간도 멋졌다. 덕분에 즐거운 사람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2008. 9. 16. 09:33
연극 39계단
2008. 8. 21. 목요일 밤 7시 39분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원래 코미디라는 장르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토니상 노미네이트와 히치콕 원작의 영화라는 배경을 보고 그냥 보기로 결정했다. 19일이 초연이었으니 거의 처음에 연극을 본 셈이다. 점심먹고 매그넘 코리아 전에 갔던 친구와는 기분좋게 헤어진 후, 다른 친구를 만나 극장으로 향했다.

원작 소설이 있고, 히치콕이 1935년에 영화화한 작품이 있다. 물론 그 영화는 보지 못했는데, 인터넷에서 살짝 찾아봤더니 히치콕이 영국에서 활동하던 시기의 가장 대표적인 걸작이라고 한다. 평범한 사람이 엉겹걸에 큰 사건에 휘말려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죽도록 고생하는 이야기인데, 사전정보가 전혀 없이 바로 연극을 봐서 미리 예상하지는 못했지만 정말 히치콕적인 줄거리에 히치콕적인 장치들로 가득한 연극이였다. 50년대 흑백영화같은 느낌이 팍팍 묻어나는.

영화라는 장르와 연극이라는 장르의 가장 큰 차이 중의 하나가 바로 배경장소 변경에 관한 점이다. 영화는 자유롭게 장면 전환과 위치 전환이 가능하기 때문에 무한히 많은 배경장소가 등장하는 반면, 연극은 정해진 무대 위에서 모든 것을 실시간으로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하나의 장소에서 모든 일이 벌어지거나, 혹은 거대한 세트를 동원한다 해도 고작 장소변경은 2-3번에 불과하다. 그러한 점에서 영화의 연극화는 매우 힘든 일이다. 특히나 히치콕의 스릴러 영화와 같은 경우에는 그 당시에는 혁신적이었다 해도 지금은 전세계인이 다 아는 줄거리 구조, 기승전결의 방식, 유머와 스릴 유도의 장치로 가득차 있다. 그래서 연극으로 잘 번안한다 해도 지루하기 쉽다. 그렇다면, 영화 원작을 연극으로 옮기는 것이 매우 어려울 뿐더러, 특히 장소변경의 제한이 스릴러라는 장르의 특성상 매우 치명적이고, 마지막으로 어찌어찌 잘 번안한다 해도 이젠 히치콕적인 것들이 너무나도 진부하다. 그럼 도대체 이 연극에서 우리는 뭘 얻을 수 있는 걸까?

하지만 연극에서는 모든 것이 관객들과 함께 숨쉬며 일어난다. 그리고 무대공간의 한계 덕분에 인정되는 배우와 제작자, 관객 간의 암묵적인 약속이 있다. 그리고 이 연극 39계단은 그 약속이 연극을 제한하는 요소가 아닌, 연극을 더욱더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요소라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 속의 그 수많은 장면전환이 아주 간단한 소품과 동작으로 소개되는데, 별것도 아닌 방법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관객(즉, 나 자신)이 참 신기하면서도, 어떻게든 그런점들을 감추려고 애쓰는 일반적인 공연들과는 달리 대놓고 그런 점들을 이용하는 이 연극은 참 즐겁다. 예를 들자면, 주인공이 기차를 타는 장면에서는 기차 모형조차도 준비되있지 않은 무대에서 주인공이 [그럼 나는 이만 기차에 타야겠소] 정도의 대사를 하고 문을 열고 들어가는 흉내를 낸 다음 긴 의자위에 앉음으로써 기차에 탔다고 관객들에게 인식시킨다. 그리고 영국 전역을 기차가 이동하는 것은 뒤 배경에 역 표지판이 지나가는 것으로 표현한다. 말하자면 무대와 주인공이 앉은 의자는 정지해있는데, 그 뒤로 대전 표지판, 대구 표지판이 지나고 부산 표지판이 등장하면 부산에 도착했다는 식이다. 문 하나를 열고 들어가면 집에 들어간거고 잠깐 둘러보며 집주인과 얘기하다가 방금 들어갔던 그 문을 다시 나오면 이젠 집 안의 방 안으로 들어간거다. 이렇게 적나라하게 관객들에게 이해해달라고 강요하는 것도 한 두번이면 그냥 넘길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그러한 점들을 관객들이 매우 잘 이해한다는 사실을 이용한다. 불필요한 장면이지만 의도적으로 집 안에서 대여섯번에 걸쳐서 방안의 방안의 방안의 방들에 들어가는 장면을 넣어 놓고서는, 그 문짝 하나만 계속 들락날락 하고 있는 거다. 관객들은 첨엔 그려려니 하고 넘어가다가도 일부러 저런다는걸 곧 눈치채고, 그러면 큰 웃음이 터진다. 몇가지 더 예들 들자면, 네모난 나무액자를 배우가 직접 들고서는 창문이라고 말하는 식이다. 또 쎈 바람이 부는 초원 위에서 달려가는 장면에서는 주인공이 스스로 자신의 외투를 펄럭이며 달린다. 물론 제자리 달리기로.

사실 그런 장면들이 웃긴건, 관객 입장에서는 자기 스스로가 웃기기 때문이 아닐까. 이때까지 많은 영상물 혹은 공연들 혹은 일상생활 속의 장면들을 봐 오면서, 우리는 어떤 장면의 작은 부분들 하나하나를 상세하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특징적인 몇가지를 골라서 인식한다. 그 덕에 심하게 간략화된 이 연극 속에서의 이동, 장면전환 등도 쉽게 이해를 할 수 있는 거긴 한데, 어떻게보면 문짝 하나를 보고 당연스레 집 전체를 생각하는 관객 본인 자신이 너무나도 신기하면서 웃긴거다. 뻔한 속인수에 불과한데, 마치 당연한 것처럼 이해가 되니까. 공연물이라는 것에 우리가 얼마나 많이 훈련받았다는 의미인가.

그리고 주인공과 달리 주변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표현하기 위해서, 연극에서는 두 명의 배우가 자신의 역할을 100여차례에 걸쳐 바꾼다. 목소리톤의 변화, 분장, 입은 옷, 모자 등을 미묘하게 다르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표현한다는 것을 알리는데, 관객 들이 뻔히 보는 한 장면 안에서 모자를 쓰면 기차 승무원, 벗으면 승객이 되는 식으로 역할을 왔다갔다 하는 것이다. 정말 거친 표현 방식이지만, 너무나도 대놓고 하는데다가, 결정적으론 참 잘하기 때문에 그런 상황들이 매우 희극적이다. 그 두분 덕분에 몇번 제대로 웃었다.

애시당초 작자는 스릴러라는 장르 자체를 포기한 것 같았다. 스릴러라는 원작의 장르는 연극에서는 그저 배경설정, 혹은 소재에 불과하다. 내용 자체를 떠나 세트와 소품등에 관한 점이 너무 재밌었다는 점에서, 내가 위에서 아무리 저렇게 글로 묘사해봤자 사실 소용없고 실제로 연극에서 봐야 무슨 말인지 이해할 것이다. 연극은 내용과 감동따위는 포기했고, 덕분에 효과적으로 웃기기에 충실한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그런 잔재미만으로 연극을 본다는게 조금은 지루하기도 했다. 제대로 된 연극이다 보니 대학로 코미디홀의 공연이나 어줍잖은 코미디연극, 혹은 로맨틱 코미디 같은 것들을 본 것 보다야 마음이 채워지지만, 연극 특유의 징한 공명은 느껴지지 않는 작품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기에 딱 좋은 작품.


그리고 처음 가본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은.. 소극장이라기 보다는 마치 뮤지컬 극장과 같은 느낌이었다. 꽤나 큰 공연장에, 편안한 좌석. 뮤지컬 극장의 크기까지는 아니겠지만, 100명도 들어가지 못하는 일반 소극장과는 달리 수백명 정도는 가뿐히 수용할 수 있는 장소였다. 소극장보다 의자가 훨씬 편하고 전체적으로 깨끗한 덕에 좋기도 했지만, 소극장 특유의 배우의 숨소리가 들리고 땀방울 맺히는게 보이는 그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아무래도 둘다 욕심내기는 무리인건가.

제목이 39계단 이라서 39분에 시작해서 2시간 후의 39분에 끝나는 연극이다. 나와 친구가 봤을때는 배우들이 약간 빨랐는지 9시 38분에 끝나고 말았다. 큰 고민 없이 골랐던 연극이 꽤나 괜찮아서 둘다 매우 만족했고, 그리고 신천으로 파전을 먹으러 갔다. 서울행 첫날이 목요일 하루는 그렇게 끝이 났다.
2007. 5. 31. 02:08

070530 수요일 19:30

작 마쓰다 마사타카
연출 송선호
출연 예수정, 남명렬, 박지일, 이정미 등.
대학로 정미소극장

소설가이자 고등학교 선생인 준모는 불치병에 걸린 아내 정숙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한동안 괜찮았던 아내가 갑자기 쓰러지고, 의사는 준모에게 남은 시간이 3개월 뿐이라고 말하는데..


신입생 세미나 현대 연극의 감상과 이해 마지막 시간. 이번엔 일본 원작을 우리나라 사정에 맞게 번안한 바다와 양산을 보았다.

하나
무대 자체가 관객이 집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고, 그 속에서 집 밖으로 내다보는 장치였다. 즉, 관객의 눈에 가까운 순으로 집의 마루-툇마루-현관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전형적인 설정과는 반대된 이런 무대는 연극이 우리에게 [보여지는] 느낌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삶들을 그저 우리가 [바라보는] 느낌을 주었다. 특히 배우가 무대위에 없는데, 방 속에 있다는 설정하에서 대사를 치거나, 혹은 관객들에게 등을 보이며 대사하는 장면이 많았기에 그런 느낌이 강했다. 얼굴 표정없이 대사를 듣는 것이 상당히 새로웠는데, 항상 정면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무언가를 표현하고자 애쓰는 그런 배우의 모습에만 익숙하다가 묵묵히 등을 보이며 대사하는 배우의 모습은 오히려 더 맛깔스러웠다. 남자의 등이란, 그 자체만으로도 무언가 말하는게 있는 법..


이전에 보았던 연극 [다우트]의 남녀 주연 배우가 바로 이 연극에서 주연 배우였다. 상당히 나로써는 독특한 경험이었는데, 한 배우가 다른 연극에서 다른 역할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남녀 주연이 다른 연극에 동일하게 등장하는 것이 무척 인상깊었다. 영화가 아닌 연극의 경우, 특히 우리가 보는 그 배우는 그 역할에만 한정지어서 가두어 생각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하면 배우와 역할을 따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역할과 배우를 일치시켜서 본다고나 할까? 그런 상황에서 다른 연극에서 같은 배우가 다른 역할을 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뭔가 어색한 느낌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남명렬 님 같은 경우는 두 배역 다 잘 커버하는 느낌이 강했지만, 특히 예수정 님의 경우 다우트에서의 연기가 내게 매우 인상깊었고, 그 특유의 말투와 목소리가 다 배역을 위해 일부러 만들어낸 장치가 아닐까 생각했던 나로써는 이 연극에서 다우트에서와 똑같은 말투와 목소리를 듣게 되자 상당히 어색했다. 연기력이 모자랐던 것은 아니지만, 말투와 목소리라는 측면에서 예수정 님은 다우트에서의 역할이 더 어울리지 않았나.. 싶다.


일본 작품을 한국 사정에 맞게 번안한 작품이었는데, 경상도가 배경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우리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 세대의 모습들을 참 경상도적으로 그리고 한국적으로 잘 보여줬다고 생각했는데, 친구들 중에는 그게 일본적인 면모가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을 피력하는 경우도 있었다. 연극 무대로 쓰인 주인공의 집 구조, 그들의 예절, 풍습, 문화 이런 것들이 너무나도 익숙했던 나로써는 놀라운 의견들이었고, 그런 친구들의 의견에 대한 배우들과 연출가의 해명은 그것이 다만 사라진 우리의 윗세대의 풍습이었을 뿐 일본의 문화였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세대간의 간극이 이렇게 컸던가.


병에 걸려 곧 죽는 다는 아내. 소설가인 남편. 출판사의 젊은 여직원과의 과거의 무언가. 그저 넉살좋고 인심좋은 이웃. 자신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아내. 무뚝뚝한 남편. 소재와 내용은 좀 진부했다. 이번 연극의 주는 이런 내용이 아니었다고 생각하기에 크게 아쉽진 않았다. 그 느림과, 동양적 디테일, 리얼리즘 이런 것들은 정말 잘 표현되었으니까.

첨언.
일본 원작이라서 그런지, 정말 느렸다. ㅡ.ㅡ;; 느림에서 오히려 뭔가를 찾는 작품이었는지는 모르겠다만.


마지막 신입생 세미나 수업이었다. 연극 후 연출가 선생님과 남명렬 님, 박지일 님과 함께 원탁의 기사로 향했다. 오늘은.. 연출가 선생님과 배우 남명렬 님과 어느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위에서 적었던 나의 느낌들도 피력했고. 이런 저런 대화들도 나누고. 하핫. 실제 연극의 연출가와 배우와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경험, 언제 다시 가질 수 있겠는가..?


p/s : 요즘 또 다시 문화생활이 넘치기 시작했다..ㄲㄲ

2007. 5. 27. 02:42
07년 5월 26일
대학로 틴틴홀

택시기사 존 스미스는 착한 아내 메리와 섹시한 아내 바바라, 두 명의 아내와 두집 살림을 하는 사람이다. 어느날, 강도사건에 휘말리면서 철저히 지켜오던 이중생활 스케쥴이 엉키고, 또 형사의 의심을 받기 시작하면서 하나씩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는데..


마침내 연극 라이어를 보았다. 개그 콘서트나 웃찾사 류를 보고 웃지 못하는 나이기에, 꽤나 걱정했었는데 그래도 재미있었다. 어쨌든, 자주 웃었으니까.
 
거짓말로 인한 상황의 얽힘이 한두겹이 아니라 연극 내내 축적되어가는데, 얽어 놓은 작가의 능력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물론 몇개 예측되는 웃음 장치들도 있었지만.

한정된 공간내에서 두 집을 묘사해내는 것도, 어찌보면 간단한 일이었지만 무척이나 새롭고 신선해 보였다. 집 현관의 위치를 다르게 설정함으로써 그냥 하나의 무대를 마치 두 집인양, 우리 눈에는 같은 공간이지만 서로 다른 집인것처럼 생각하게 했다. 연극이기에 어쩔 수 없는 방법이었겠지만, 오히려 더 연극적인 맛을 느끼지 않았나 싶다.

뭐. 내용은 뭘 딱히 생각하게 만드는 내용은 아니다. 그냥 웃긴거ㅎㅎ


음.. 혹평만 일삼은 것 같은데.. 그렇지만, 내가 본 연극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을 연극일 것 같다.
정말 함께 연극을 보고 싶었던 사람이랑 처음으로 같이 본 연극이니까.

문화생활은 함께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느낌도, 의미도 참 다르다.
2007. 5. 17. 00:24
다리퐁모단걸(Telephone Modern Girl)
이해제 연출
배수빈 최보광 출연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개화기 대한제국, 새로 전화기가 도입되면서 여러 일들이 벌어지는데....


하나.
연극을 같이 보고 있던 많은 분들이 꽤나 자주 큰 웃음을 터트렸는데, 왜 웃긴줄은 이해했지만 나는 사실 그닥 몇번 웃지 못했다. 솔직히 개화기에 새로이 도입된 전화기에 관한 에피소드들은 이제 거의 상식이 될 만큼 흔한 이야기 아닌가? 특히 계급사회에서 새로이 도입된 전화기가 일으키는 소동(왕의 전화에 관복입고 절하다가 전화가 끊기는 경우 등등)은 물론 웃기긴 하지만 솔직히 진부했다.

둘.
주로 광선태(배수빈)와 서연(김영은)의 사랑이야기와 그 사이의 전화교환수 김외출(최보광)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긴 하지만, 앞서 얘기했듯이 이 연극은 하나의 큰 줄기를 따라 기승전결이 이루어지는 연극이었기 보다는 여러개의 에피소드들을 엮은 느낌이 강했다. 에피소드들의 연결이 크게 어색하거나 그런건 아니었지만, 작은 상황위주로 극이 돌아가다 보니 절정도 없고(물론 절정으로 노린 듯한 부분이 있긴 했다.) 연극이 끝났을 때도 지금 내가 박수를 쳐야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여지는, 그런 연극이었다는 거다. 소소한 재미는 많았지만, 큰 한줄기의 감동을 전해주지는 못했다고나 할까.

셋.
새로이 등장한 전화기라는 매체를 통해 이루어지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은 비록 100년 전의 상황이기에 관극하던 그 누구도 겪지 못한 경험이었겠지만 모두가 아련한 기분을 느꼈을 것 같다. 그 상황들을 보면서, 휴대폰과 문자에 얽힌 나의 추억들이 대칭적으로 떠올랐다. 문자를 기다리는 마음, 전화가 안될때 답장이 없을때의 답답함, 얼굴보면서는 하지 못하는 말들이지만 전화로는 쉬웠던 말들, 꼬박 전화하다 어느새 해가 떴던 일.

저 윗세대에는 그저 전화기에 얽힌 사랑 사연이 많을 테고, 약간 위로는 삐삐와 관련된 사연들, 혹은 이메일?, 그리고 지금네 우리는 휴대폰과 문자메세지와 관련된 사연이 많을 것이다. 이제 우리 밑으로는 화상통화, 등등등 을 통한 또 새로운 사연과 애틋함들이 쌓이겠지. 기술의 진보가 가져온 새로움에 우리 인간은 결국 적응하고, 그에 맞는 새로운 생활 양식(특히 사랑을 나누는 새로운 방법)을 만들어냈다. 극 중 한 신하의 전화내용에서처럼, 결국은 그 '다리퐁'도 그저 그런 익숙한 것들이 되고 말았고, 앞으로 새롭게 등장하는 것들도 그렇게 우리 삶 속에 익숙해질 것이다. 새로운 기술이 더더욱 빠르게 등장하는 오늘날, 예전의 그런 애틋함이 그저 구식이고 오래된 것이 되어버렸을 뿐인 오늘날, 그런 하루하루를 살아가니까 예전이 그리울 수 밖에.(심지어 스무 살도 느끼는 예전에 대한 그리움~)



음.. 주로 비판만 한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볼만한 연극이었다.ㅠ 시계를 연극 끝날때가 되서야 봤으니까.

끝으로 인상깊었던 대사 하나.
가슴에서 홍수가 나서 눈으로 흘러 넘치고 있어...
2007. 4. 20. 17:41

학전 블루 소극장
원작 존 폐트릭 쉔리 John Patrick Shanley
연출 최용훈
출연 예수정 남명렬, 윤다경, 우명순

2005 퓰리처상 드라마부분 수상, 2005 토니상 4개 부분 수상

1964년, 어느 카톨릭 성당의 부속 학교에 첫 흑인 학생 뮬러가 다니고 있었다. 따돌림을 당하는 그 아이를 보살피는 유일한 따뜻한 손길은 플린 신부(남명렬 분)뿐이다. 그런데, 뮬러가 속한 반의 담당 수녀인 제임스 수녀(윤다경 분)는 이 학교의 교장인 엘로이셔스 수녀(예수정 분)에게 어느 날 뮬러가 플린 신부다 단 둘이 면담하고 난 후 돌아왔을때 이상한 모습을 보였다는 보고를 하고 이에 엘로이셔스 수녀는 플린 신부가 부적절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하는데......


이번 신입생 세미나에서는 연극 다우트를 감상하였다. 연극 초반부에는, 엘로이셔스 수녀의 의심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심증만 가지고 이루어지는 편집증 적인 증상으로 그려진다. 사랑으로 학생들을 대하기 보다는 규율과 엄격함으로 학생들을 관리하고자 하는 엘로이셔스 수녀를 어느정도 부정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그녀의 의심은 더더욱 비합리적으로 느껴지게 한다. 하지만, 계속된 그녀의 의심앞에서 플린 신부는 적절한 해명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다 결국 플린 신부가 정말 뮬러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는지에 대해 관객이 아무런 답을 얻지 못한채 연극은 끝나고 말았다.

연극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엘로이셔스 수녀의 의심의 진위여부를 가리고자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의심 자체에 대해 뭔가 철학적인 의문을 관객에게 던지고자 한 듯 했는데, 편집증적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엘로이셔스 수녀의 의심에 대한 확신은 사실-거짓의 관계와 확신-의심의 관계에 대해 많은 생각을 가지게 만든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진실은 그 진실 자체로 완성되는 것일까 아니면 사람들의 믿음이 그 사실에 덧붙여 짐으로써 그것이 진실이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비록 거짓일지라도 흔들리지 않고 한결같이 그것이 진실이라고 모두가 믿는다면, 그것은 진실이 되는 것일까?

(여기서부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연극 본 후에 가장 많이 생각한 것은, 사실 저런 답이 없는 철학적 질문보다는 현실적인 걱정에 대한 것이었다. 아직은 내가 학생에 불과해서 느끼지 못했던 점이지만, 훗날 사회에 나가 어떤 조직 속에서 상사나 동료가 날 특정한 이유나 증거없이 무작정 끝없이 의심하고 미워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내 아랫사람이 그런다면야 물론 권력을 동원하면 되겠지만..(^^) 상사나 동료라면 얘기는 달라질 것이다. 연극 속에서는 플린 신부가 과연 떳떳한지 아니면 떳떳하지 않은지에 대해 확실히 결론지은 것은 아니지만, 과연 정말 나 스스로는 떳떳한데, 정말 얼토당토 않은 이유로, 심지어는 아무 이유없이, 상사가 날 괴롭히고 미워한다면? 어쩌면 그냥 그 미움과 의심을 해결할려고 끝없는 노력을 하는 것보다 그냥 플린 신부가 다른 교구로 옮긴 것처럼 내가 그 직장을 떠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아니다, 그런식으로 하다가는 어디서도 자리 못잡는다. 어떻게든 참고 이겨내야 한다? 사회에 나가면 정말 별별 종류의 사람들을 만날것이다. 아직은 미리 상상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정말 두려운 상상이 아닐 수 없다.
(스포일러 끝났어요)

모든 연기자가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기는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잠깐 등장할 뿐이었던 뮬러부인(우명순 분)의 연기가 가장 인상깊었다.

연극 후에는 플린 신부를 연기한 남명렬 분과 함께 극장 근처의 술집에 갔다. 음.. 물론 나는 되도록이면 교수님과 연기자 분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았다. 가까이 앉았다가는 제대로 술자리를 즐기지는 못하고 연극 얘기만 하게 되거든..^^ 물론 그런 얘기 하는 것도 좋지만, 어제는 그저 같이 수업듣는 사람들과 이런 저런 얘기나 하고 싶었다. 그리고 갔던 술집은 원탁의 기사 라고, 대학로 내에서 정말 유명한 술집인듯 했다. 아주 오래전 연극 포스터들이 벽에 줄줄이 붙어있고, 주인아저씨와 배우분들이 서로 인사를 나눌 정도로 친분이 있었다. 다시 태어난다면 꼭 배우가 될거라고 말하는 주인 아저씨. 정말 영화나 드라마에 나올법한 그런 분이셨던것 같다. 극장 옆에서 술집을 운영하면서, 연극에 대한 자신의 열정과 꿈을 늘 간직한채 살아가는 그런 분.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끝으로, 요즘 문화생활을 너무나도 많이 한다는 걸 느낀다. 넘치면 뭐든지 안좋은 법인데.. 시험공부에 지쳐있을 나의 친구들은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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