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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에 해당되는 글 4건
2012. 7. 27. 15:07

내가 다니는 학교의 10가지 졸업요건 중에는 수영시험이 있다. 수영장에 점프해서 입수한 후, 25야드 레인을 한번은 엎어져서, 한번은 뒤집어서, 그리고 아무 자세로나 한번 더 수영하면 되는 시험인데, 제대로된 자세일 필요없이 개헤엄이든 어떤 자세든 그저 가기만 하면 되는, 시간제한도 없는 시험이다. 처음 코넬을 가기로 결정하고 이 수영시험에 관한 글을 읽었을 때엔 (무늬만) 서울대 학생이었는데, 잠시 포스코 센터 수영 수업을 들을까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마냥 노느라 정신없던 시기라 고민만 하다 말았고, 결국 코넬 입학 후 주변 친구들 모두 수영시험치러 갈 때 난 멍하니 방에 있었던 것 같다.  

20살 그 때까지 나는 수영할 줄 모르는게 그렇게 이상한 건지 몰랐다. 생각해보니 태어나서 평생 수영장을 단 한번 갔었더란다 - 아마 초등학생때 였던거 같은데, 엄청 추워했던 기억, 그리고 거울 속 새파란 내 입술을 아주 신기해했던 기억이 난다. 게다가 우리 가족이 피서를 그렇게 많이 가는 편조차 아니었고, 모두들 바다보다는 산을 좋아했기 때문에 해수욕도 몇번 못해봤다. 말 그대로 '수영'이란 것을 접해본 적 조차 없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이 이상하다고는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한국에서는 수영에 대해 크게 얘기를 나눌 일도 없었고, 취미생활로 수영을 하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았기 (혹은 학창시절엔 다들 운동취미같은 사치를 부리지 못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게 웬걸, 미국에선 수영을 할줄 모른다니까 마치 나를 걸을 줄 모르는 사람 취급 하는 것이었다! 기분이 나쁘다기 보단 신기했다. 한국 친구들은 부산에서 고등학교 다녔다면서 어떻게 수영할 줄 모르냐며 핀잔이었고, 백인애들은 '아.. 그으래..?' 하며 의아해하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2007년 가을, 대학 첫 학기에 초급 수영 수업을 들었다. 다른 강의들 중간에 끼어있는 수영 수업은 너무나도 귀찮았고 (수업 전 수영복을 갈아입고 수업 후엔 샤워를 해야하고..), 수영 후의 강의시간엔 깨어 있었던 적이 더 적었던거 같다. 그래도 나름 열심히 수업 참여를 했는데, 돌이켜보면 평생 물에 떠보려고 한 적 조차 없는 사람이 일주일에 두 번 있는 수업 10주 했다고 해서 수영 시험을 치를 수 있는 수준에 이를 수가 없는 거였다. 운동신경이 뛰어난 친구들도 힘들텐데, 뛰어나기는 커녕 평범한 수준도 못되는 나로써는 택도 없었다. 수업을 듣고 수영 시험을 통과하는 친구들이 얼마나 멋지고 부러워 보이던지....

시험 통과를 못해도 수영 수업을 들으면 그 졸업요건을 만족시켜 줄 만도 하건만, 그런건 얄짤 없었다. 난 초급수업에서도 늘 가장 못하는 축에 속하는 나 자신을 보며 과연 수영시험을 언젠가라도 통과할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지만, 그땐 1학년이었으니까 그냥 막연히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2학년도 지나고, 군대를 갔다왔다. 복학 후 어쩌다 동생들이랑 (복학한지라 다들 동생들이니까..) 수영 얘기가 나오면 아직도 통과 못했다고 얘기하는 것이 은근히 뭔가 부끄럽더라.. 그치만 운동과 관련된 건 모조리 다 자신이 없는 터라 - 과연 연습한다고 내가 통과할 수 있는 수준이 될 수 있을까 - 라고 생각했기에 수업을 다시 들을 생각은 없었다. 덧붙여 앞서 말했던 대로 학기 중에 수영 수업을 듣는다는 건 너무나도 귀찮은 일이었으니까. 그렇다면 그나마 남아있는 해결책은 편법 뿐이었다. 백인들은 아시아인들을 외모로는 잘 구분해내지 못하고, 더군다나 시험중에 학생증 검사를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에 수영을 못하는 친구들은 할 줄 아는 친구에게 대신 시험을 쳐 달라고 부탁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최악의 경우엔 나도 그렇게 해야겠지... 정도의 생각을 했다. 


그러던 마침, 이번 여름을 학교에 남아 있기로 마음 먹으면서, 한번 더 수영 수업을 들어보기로 했다. 방학중이라 비교적 덜 귀찮을테고, 또 '수업'이 주는 강제성 덕분에 방학중에 꾸준히 운동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도 나도 사람인데 한번 더 들으면 통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그래도 나는 안될것 같다는 자기부정을 동시에 생각했던 것 같다. 게다가 알고 봤더니, 수업을 두 번 들으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해도 졸업요건충족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시험을 통과하든 못하든 어찌됬든 나는 편법이 아닌 떳떳한 방법으로 졸업요건을 채운 것이 되니까, 그걸로도 만족스러울 것 같았다.

5주 동안 화수목, 4시부터 5시 반까지의 수업이었다. 그래도 한번 수업을 들은 적이 있어서인지 이번에는 초급 수업 내에서 그나마 잘하는 편에 낄 수 있었다. 운동도 많이 되고, 조금씩 조금씩 실력이 느는게 느껴지면서 재미도 느꼈다. 2주차 쯤이 끝났을 때, 5년 전 수업을 다 듣고 난 직후 정도의 수준으로 회복한 것 같았다. 그럼 이제부터 진짜 연습 시작이겠지 - 한번씩 유튜브에서 수영강습 동영상을 찾아보기도 하고, 자기 전 침대에 누으면 수영 자세들을 이미지 트레이닝하면서 잠들고 그랬다. 하하. 게다가 수영장 개방 시간에 찾아가서 혼자 따로 연습까지 하고 했는데, 이게 왠걸, 도무지 늘지 않았다. 물흐르듯 부드럽게 하면 된다고 하지만 내 몸은 그렇게 부드럽지 않으니까.. 별다른 진전 없이 3주차, 4주차가 끝났고, 이번에도 이렇게 통과 못하고 수업을 마치나... 생각했다. 괜시리 안풀리는 다른 일들까지 함께 뭉쳐서 역시 나는 안되는 건가하는 말못할 패배감에 짜증스러웠다.

이번 화요일 수업이 끝나고, 한번 현실적으로 생각해봤다. 수업은 세번 더 남았는데, 그 사이에 실력이 충분히 늘 것 같진 않고, 하지만 느리게라도 늘고 있는 건 느껴지니까 조급해 하지 말자. 개학할때까지 아직 삼사주 더 남았고 그럼 수업 끝나도 꾸준히 와서 연습하다가 개학 직전 시험을 치면 붙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무리 내가 운동을 못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받아들이기로 했다지만 이렇게까지 하고도 수영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는 건 자존심에 상처이기도 했고, 덧붙여 그나마 요즘 생활에서 수영이 유일한 낙이었던 것도 계속 수영을 하고싶어 하게끔 했다. 학교에서 하고 있는 연구참여가 잘 풀리지 않는 덕에 현재는 답답하기만 했고, 게다가 다가올 가을학기의 숨가쁨과 대학원 지원의 부담감까지 컸던지라 눈 앞에 육체적 목적을 하나 만들어 놓으니 무언가 현실도피적 효과도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마음을 가볍게 먹고, 수요일 수업을 치르고, 오늘은 목요일이었다. 오늘 아침엔 연구실에 일찍 가야할 일이 있어 평소보다 많이 못자고 일어났는데, 감기에 걸린 건지 그저 비염이 잠깐 심해진건지 하루종일 재채기에 눈물 콧물만 잔뜩이었다. 그렇게 수영 수업시간쯤 되자 너무 피곤했다. 어짜피 오늘도 안될텐데, 그냥 집에 갈까. 어짜피 삼주 더 연습하기로 마음 먹었는데.. - 싶었지만, 수영장에 콧물 다 흘리는 한이 있더라도 가서 연습해야겠다는 마음으로 (^^) 수영 수업을 향했다. 얕은 물에서 한시간 정도 계속 연습하다가, 수영 선생님이 깊은 물에 점프해서 들어가는 연습이라도 하자며 깊은 풀로 이끌었다. 무서움은 이제 많이 없어져서 난 쉽게 점프했고, 그 모습을 보고는 선생님이 점프 후 자연스럽게 수영 자세로 이어지는 연습을 하자며 한 5미터 정도만 수영해서 앞으로 나아가서 멈춰 보라고 했다. 다시금 물에 풍덩 빠졌고, 수영하기 시작했는데, 한번 갈만큼 가보자 하는 생각에 계속 나아갔다. 죽죽 죽죽 - 아 이제 더 못하겠다 싶어서 덱을 잡고 물에서 나왔을 때, 눈 앞엔 5미터도 남아있지 않았다. 선생님은 보라고, 할 수 있다고, 조금만 더 나가면 해내는 건데 왜 멈췄냐면서, 한번 더 해보자고 하셨다. 화요일 수요일 수업때 한명 씩 이미 시험을 통과한터라 걔네들이 무지하게 부러웠는데, 막상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나도 해볼만 할 것 같았다. 숨을 고르며 잠시 쉬는데, 한 시간이 넘는 연습에 몸은 이미 녹초가 되어서 과연 할 수 있을까, 자유형으로 한 레인 했다고 해도 두 레인을 더 수영해야 되는데 이렇게 지쳐서 과연 가능할까 또 한번 나를 의심했다. 에잇, 뭐 안되면 멈추고 한번 더 남은 마지막 수업시간에 하면 되지, 오늘 이정도 한거 보면 적어도 화요일엔 눈 딱 감고 하면 통과하겠네 - 라고 가볍게 생각하기로 하고 다시 도전했다.

그리고, 통과했다. 세 레인을 마치고 났을 때의 그 성취감이란... 온 몸은 녹초가 되고 다리가 풀려서 그냥 털썩 수영장 바닥에 주저앉았지만, 결국 해냈구나 하는 성취감은 정말 짜릿짜릿했다. 같이 수업듣는 친구들 모두 축하한다며 하이파이브를 날렸고, 고맙다고, 웃으며 받아쳤다. 수영 후 샤워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지쳤지만, 기분은 너무 좋았다. 결국 해냈구나! 결국! 결국! 결국! 별로 늘지 않는다고 열심히 연습하지 않았으면 어떡할 뻔 했으며, 감기기운에 수영장을 안갔으면 어떡할 뻔 했으며, 지쳤다고 한번 더 시도해보지 않았으면 어떡할 뻔 했는가! 그래도 이번 여름, 여러가지 성취하고 해내는구나 싶어서 너무 뿌듯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니, 기분이 묘했다. 사실 마지막 레인에서 나는 다 도착한 줄 알고 (배영이라 얼마나 갔는지 제대로 안보였다) 멈춰 섰는데, 한 50센티? 정도 덜 도착한 상태에서 내가 일어선거였다. 한번만 더 팔을 저으면 닿는 거리였고, 아무리 지쳐있었다지만 한번 더 저을 수 있는 정도는 됬었기에, 그리고 수영 선생님도 그정도면 됬다고 해서 시험은 합격한 거였지만, 뭔가 마음이 사실 좀 찜찜했다. 남들에겐 가볍게 그냥 치면 되는 시험이었을지 모르지만 나로써는 너무나 큰 목표였기 때문에, 오히려 더 결벽스럽게 달성하고 싶었던 걸까. 괜시리 찜찜한 기분에 다음 화요일 마지막 수업에 다시 시험을 쳐서 제대로 채울까, 아냐 또 한번 더 하기엔 너무 힘들었어 - 이런 생각들이 머리 속을 둥둥 떠다녔다. 그래서 깔끔하게 마무리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계속 마음이 불편한가보다, 싶었는데, 사실 시간이 좀더 흐른 지금 생각해보면, 이 묘한 기분은 그것 때문만은 아닌거 같다.


현재의 답답함과 미래의 숨가쁨과 부담감. 눈 앞에 단기간의 작은 목표를 세워서 그걸 바라보며 저 거대담론들을 잊고 도피하려고 했나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버티지 못할 것 같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막상 생각보다 그 작은 목표를 빨리 달성하니까 기분이 불안한거다. 이제 뭘 붙잡고 버티지. 뭘 생각하며 저것들을 잊지.  

며칠 전 힐링캠프에선 안철수 교수가  안랩 초기시절의 일화를 말했다. 단 몇십원 정산이 맞지 않아 야근하며 장부를 정리하고 있는데, 순간 내 동기들은 지금 의대 교수하면서 인정받고 살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단다. 그 생각에 와르르 무너진 자신을 다시 세우는데 사흘이 걸렸다고 했다. 내가 군대에 있을 때, 상병이 되고 몇개월 후였나, 어느 한 날 동시에 고등학교 동기는 사법고시를 통과하고, 대학교 동기는 하버드와 예일 로스쿨이 붙어서 고민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던 것 같다. 나는 이곳에서 썩어가고 있는데 저들은 저렇게 성취하며 나아가고 있구나 - 현실에 대한 짜증과 답답함이 한꺼번에 몰려왔고, 그 슬럼프에서 벗어나오는데 나도 사나흘 정도 걸렸다. 다만 사나흘만에라도 그 함정에서 헤어나올 수 있었던 건, 중요한 건 나 자신이지 남과의 비교가 아니고, 나는 내 갈 길을 잘 가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나 자신을 충분히 믿을 수 있다면 지금 저들의 저런 소식에 내가 이렇게 속상해할리 없으니까, 결국 중요한건 얼마만큼 자기 확신을 가질 수 있느냐 인거다.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에 얼마나 확신을 갖고 얼마나 성실히 걸어가고 있는가 -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비로소 슬럼프에서 헤어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나 자신을 보며 괜히 스스로 많이 성숙했구나 싶어서 뿌듯해 했던 것 같다.ㅎㅎ

어떻게 보면 저 비슷한 슬럼프를 사나흘이 아니라 이번 방학 내내 앓아왔던것 같다. 이번엔 비교대상이 남이 아니라 내가 그렸던 허영스런 내 미래였지만, 그래서 오히려 헤어나오는데 더 긴 시간이 걸리나보다. 안철수 교수는 그런 슬럼프를 다시는 겪지 않기위해 크지 않은 작은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는 성취감에 의미를 찾았다고 했다. 지금 나에겐 수영이 그런 작은 목표였는데, 이제 끝났다. 그런데 그 성취감에 취해 있기에는, 작은 장애물로 어설프게 가렸던 압도적 현실이 다시 보이니까 두렵고 막막한거다. 

하지만, 언젠간 맞닥뜨려야 할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이루지 못 할 것만 같았던 수영시험마저 합격한(!!^^) 자신감으로 한층 더 무장했다. 작은 목표의 성취감이라는건 그 자체로써 보상이라기 보단 미래를 향한 벽돌같은 건가보다. 작은 벽돌들을 많이많이 모아야 집을 지을 수 있겠지.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다시 마음이 편해졌다. 


스무살 무렵, 친구들이나 동생들에게 항상 뭔가 대단한걸 이뤘던 적이 있는 것처럼 이런 말들을 하곤 했다. - 목표만 맹목적으로 보고 가는건 좋은 것만이 아냐, 막상 그 목표에 도달하면 내가 왜 이걸 이루고 싶어했는지, 여기에 도착해서 뭘 하고 싶어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거든. 그때 느끼는 허무함과 막막함이 오히려 더 힘든거 같애.. - 저런 염세적 생각에서 제대로 빠져나온건 군대를 갔다온 스물네살이 되어서였다. 아니, 다 정리됬다기 보단 감당하고 살아갈 수 있게 됬다고나 할까. 그 허무와 막막을 겁내며 목표를 만드는 것을 두려워 하는 건 그 목표를 마치 인생의 최종 도착지인양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 목표들은 사실 인생의 중간과정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그러면서도 무의미하고 불가치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런 중간걸음 하나하나에서 의미와 재미를 찾다 보면, 아쉬울 순 있어도 후회는 없을 최종 도착지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한 계단 오른 기쁨과 다음 계단을 바라보는 기대감을 늘 함께 가진다면, 그러면서도 그것들이 그저 몇 개의 계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다면, 나아가는 한걸음 한걸음은 설레면서도 담담하고, 무겁지만 가볍고, 겁이 나지만 여유있는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뭐니뭐니 해도, 제일 중요한 건 내 마음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엔 사나흘이 아니라 서너시간만에 슬럼프를 딛고 나온거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헤헤. 그나저나 나도 참, ㅎㅎ '고작' 수영시험 하나로 생각이 이리도 많다 ㅋㅋ 쓸데없이~

2011. 5. 7. 22:10
로열 패밀리
MBC 수목 미니시리즈 오후 09:55~ (2011년 3월 2일 ~ 4월 28일) 총 18부작
김도훈 연출, 권음미 극본
염정아, 지성, 김영애, 차예련 주연

 
재밌다는 소문에 10화까지 방영되었을때 부대 내에서 찾아보았다. 주말만에 그 10화를 다 보고, 나머지 8화를 기다리고 보며 4월을 보냈다. 이제 5월 6월은 뭘로 보내지?

4화 47분경
- 우리집 여자들, 모유 못먹여. 올케 혼자 기쓰고 먹이겠다고 우겨서 생긴 일이야. 
- 그래서, 모유를 먹인다고 엄마를 가둬? 왜? 얘기 해. 나하고 김여사 사이는 그렇게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니네집 치부엔 왜 꼭 입을 다무는거야?
- 가슴 모양 망가지잖아. 우리 엄마한테 며느리는 애엄마라기보다, 아들 노리게 감이거든. 

4화 58분
- 나 10살 때, 보스턴으로 공부하러 갔는데, 맹장이 터지기 직전이었어. 한국에 엄마한테 전화해서, 배아프다고.. 엄마가 뭐랬는줄 알아? 영어로 얘기하라구.. 세상에 허튼 돈이란 없다고. 돈 쓰면서 유학 갔으면 빨리 영어 배워야 한다고. 영어로 얘기하셨어. 난 울면서 영어로 얘기했어. 배아프다고.. 

단순한 재벌가의 이야기인줄 알고 처음엔 그 속도감과 흡인력에 빠져들었다. 재벌가에 대한 몇몇 묘사는 그저 드라마적 재미로만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놀라워서, 소름이 끼치곤 했다. 그래도 설마, 실제로 저 정도이진 않겠지? - 싶다가도, - 사람 사는 일 모를 일이지 - 싶더라.
 

2화 56분경
- 김인숙씨, 나 고아에요. 그치만 우리 엄마 원망 안해. 버릴땐 그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죽을만큼 힘들었겠지. 그래, 본인만 행복하다면 정말 다행이다. 정말 그렇게 빌어요, 진심으로
- 함부로 말하지 마! 니가 자식버린 엄마 심정을 어떻게 알아!
- 왜 몰라! 사람 힘들면 자식이 아니라 간도 떼고 콩팥도 떼는 거야. 힘들면 버려야지 어쩌겠어! 사람 다 그렇게 사는 거잖아. 김여사 엄마이기 이전에 사람이잖아!

사연 없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예전엔 절대 이해할 수 없었던, 그 순간에는 눈뜨고 쳐다보지조차 못했던 모습들도 시간이 흐르면 그저 우스운 추억거리가 된다. 그때
의 나는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고 분석분류하고 단정지어서는 그런 나만의 명쾌한 세상 속에서 만족하며 살았는데, 내가 열심히 욕했던 그 모든 것들이 알고보면 다 사연과 이유가 있는 일이었다. 나 역시도 그런 사연에 한번씩은 휩쓸렸고 어느덧 멈춰서 돌이켜보면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나를 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과거의 나를 지금의 나는 안타까워한다. - 네가 (혹은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그런 것만은 아닌데.. - 그렇게 조금씩 내 이해의 폭은 넓어졌지만 더불어 명쾌함은 옅어져 왔다. 하지만 그래도 혼란스럽지 않았던건, 가장 밑바탕에 깔린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에 대한, 인간성에 대한 절대적 믿음과 확신. 

12화 43분경
- 왜 저 구명 하셨어요?
- 그게 왜 궁금한건데?
- 제가 법을 다뤄보니, 이제야 좀 알겠더라구요. 모든 정황이 저를 범인으로 가르키고 있었잖아요. 현지 주검 옆에서 나온 곰돌이, 흉기, 혈흔, 멍청한 제 거짓말, 이어진 자백. 정말 뒤집기 힘든 상황이었는데, 왜 맡으셨어요? 돈, 명예?
- 허허. 그래 꿩 먹고 알 먹고지 임마! 허허
- 아이 정말 왜그러세요, 이제 좀 말씀 해 주세요. 너무 뛰어나신 분이라 남이 못보는 뭔가를 보신 거에요?
- 믿고 보면 보이는 것들, 믿지 않고 보면 보이지 않는 것들. 김여사가 어디서 그 곰돌이가 없으면 니가 잠을 못 이룬단 얘기를 들은 모양이더라. 세상에 어떤 고아가, 엄마 대신에 곰돌이를 살해 현장에 던지고 오겠냐. 법 윤리책에 이런 말이 있지. 사람이 살해를 하는 동기는 535가지. 그런 그 동기를 뒤집을 수 있는 한 가지 절실한 이유만 있어도, 무죄를 전제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거. 김인숙씨가, 날 움직였다. 너에 대한, 절대적 믿음과 확신.

정황과 증거로 세상 모두가 등을 돌릴때, 인숙(염정아)은 지훈(지성)을 절대적으로 믿었고 그것이 지훈을 구원했다. 사실 그 믿음은 지훈보다도 더 꼬이고 상처입은 과거를 가진 인숙이 자기절망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안간힘이었을 것이다. 드라마의 후반 8화는 그런 인숙을 이제 지훈의 절대적 신뢰가 구원하는 모습을 그린다. 

14화 43분경
- 어쩌면 마리가.. 제일 힘든지도 몰라, 지훈아.
- 어떻게 그렇게 쉽게 용서가 되요, 엄마는?
- 용서가 아니라, 믿는 거야. 

명백한 정황 속에서 지훈도 흔들렸지만, 지훈은 믿음을 놓지 않는다. 이유와 정황, 증거가 있어서 이해하고 믿고 용서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배경없이도 무조건 믿어야 하지 않을까. 증거에 의한 차가운 믿음은 자기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위로를 주지만 치유나 구원이 되지는 못한다. 무조건적 믿음과 이해. 나라는 사람에 대한 무한한 신뢰. 그 인간적 따뜻함만이 절망의 벽을 녹이고 나를 다시 인간이 되게끔, 사람이 되게끔 한다.



그리고 기타 감상.
1. 그런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믿음은 가족간의 사랑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기에 나는 지훈과 인숙이 모자지간이라고 믿었다. 극중에서 지훈-인숙의 감정이 남녀관계적 사랑이라고 계속 암시할때도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극의 마지막에서 좀 더 확실하게 표현하는 지훈을 보며 아쉽진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따뜻했다. 그런 절대적 신뢰가 가족 사이에서만 가능하다는 걸 거꾸로 보면, 남과 여가 서로에게 그런 믿음을 가질때 비로소 둘은 연인을 넘어 가족이 되는 거라고도 할 수 있겠지? 

2. 염정아 씨 연기력 정말 최고였다. 알듯 말듯한 미소와 표정, 그 예민한 미묘함에 감탄이 쩍쩍! 

3. 염정아, 차예련 정말 너무 이뻤다. 덕분에 다시 내 취향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길고 얇고 성숙한 여성미ㅋㅋ 차예련 씨에게는 보고 따라갈만한 롤모델로 염정아 씨가 정말 딱 좋지 않을까. 외모적 분위기도 정말 비슷했다.



첨언
입대 이후 감수성을 항상 집에 놓고 다닌 것도 있었고, 또 전역하고 나면 글을 쓰겠다는 결심을 했던지라 계속 글을 못 쓰고 또 안 써왔다. 이제 전역까지는 두 달 남았다. 손가락 한번 풀어보자는 마음으로, 다시 포스팅을 시작한다. 물론 다음 글은 적어도 두달은 있어야 올라오겠지만? ^^

2008. 11. 23. 19:32
#1
예전에 포스팅한 적이 있는데, 밀란 쿤데라의 [농담]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128쪽
그러나 오늘날 나는 그를 무엇보다, 한 젊은이로, 연기를 하는 한 사람으로 보게 된다. 어찌 됐거나 젊은이들이 연기를 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삶은, 아직 미완인 그들을, 그들이 다 만들어진 사람으로 행동하길 요구하는 완성된 세상 속에 턱 세워놓는다. 그러니 그들은 허겁지겁 이런저런 형식과 모델들, 당시 유행하는 것, 자신들에게 맞는 것, 마음에 드는 것, 등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그리고 연기를 한다.

163쪽
도대체 어째서 나는 어른으로 심판받고 추방되고 트로츠키주의자라고 선언되고 탄광으로 보내지고 그렇게 모든 데에서 어른이어야 하면서 사랑에서만은 어른이 될 권리도 없고 이렇게 미숙해서 모든 창피를 감수해야 한다는 말인가?


20대가 되면 어른이 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현실을 마주친 그 첫 시기에, 저 구절들은 나에게 정말 뜨겁게 다가왔다. 그리고 벌써 거의 20대의 2년을 보낸 지금, 이젠 - 왜 대체 나는 어른인척해야 하는가 - 라고 어리광 부리는 시기는 지난 것 같다. 그렇다. 어리광. 나는 어리광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왜 나만 왜 나만 - 이라고 외치는건 어리광이다. 세상에 대한, 주변 사람에 대한, 그리고 본인에 대한. 이젠 그렇게 투정부리고 싶을때 잘 참곤 한다. 그리고 그럴때면, 저 구절이 생각난다. 그리고 생각한다. 아직도 저 구절이 뜨겁게 내 마음에서 울리는건, 여전히 나는 어리광 피우는 중이라는걸. 아직은 좀 더 커야 한다는 걸.



#2
이번 학기에 유독 내 주변 사람들의 이성관계가 시끄럽다. 만나기만 하면, 맥주 한잔만 걸치면 오직 그런 얘기 뿐이다. 지금은 그런 문제들에 한걸음 비켜서 있는 나로써는 그저 웃으며 내 나름의 조언들을 해줄 뿐인데, 스스로 말하면서도 과연 내 조언이 신빙성이 있는가 싶을때가 많다 ㅎㅎ 나도 같은 상황에 처하면 똑같을게 뻔하니까.

그리고 그렇게 우왕좌왕 고민고민 좌충우돌 찌질찌질 대고 있는 얘기들을 듣다보면 과거의 내가 많이 생각난다. 그래, 나도 그랬던 적이 있었지. 그 4년간의 기억들이 약간은 찝찝하고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있었는데, 요즘엔 주변 사람들의 모습들 때문에 오히려 감사하단 생각이 많이 든다. 나는 그래도 일찍 감정적으로 풍부한 경험들을 - 그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 많이 했구나. 덕분에 그래도 그때보단 좀 더 성숙하게 행동하고 말 할 수 있지 않을까.

과거의 나는 어떠했을까 하는 궁금함에 얼마전 다시한번 일기장을 읽어봤는데, 몇번을 혼자 킥킥거렸다. 난 정말 어찌나 그렇게도 뭘 몰랐는지. 여전히 알아가야할 것들이 많이 남았는데, 그땐 정말 훨씬 더 어렸었다. 그때에 나는 여자관계에 있어서 찌질하다고 할 수 있는 왠만한 모든 행동은 다 해봤던거 같다. - 문자로 고백하기, 혹은 엠에센이나 전화로 고백하기, 친구들한테 징징대기, 사소한것에 지나친 의미두기, 혼자 소설쓰기, 안좋은 면만 바라보고 부정적으로만 난 안된다고만 생각하기. - 모두다 지금 현재 내가 남들에게 절대 해선 안되는 것들이라고 말하는 것들인데, 정말 난 다 해봤구나. 그때 정말 무슨 생각으로 저런건지,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기까지 하다.



#3
일기 속 옛 여자친구와 관련된 글 중 거의 마지막 글에는, 이런 부분이 있었다.

070712 오후 5:40 목요일
너 유학가는거 진짜 따악 한달 남았다 ㅇ_ㅇ?
근데 막상 다가오니까
또 ㅎㅎ
너 유학가도 우리 더 잘 지낼 수 있을거 같고 ㅎ
그래 ㅎ
유학가면 당장 몇 달은 너 무지 바빠서 연락 많이 못하고 그럴수도 있겠지만 ㅎ
그렇다고 해서 속상해 한다거나 못 믿는다거나 안그럴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우리 잘 하자 +ㅂ+

출국하기 한달 전, 여자친구가 내게 MSN메신저로 했던 말인 것 같다. 그 말을 들었던 그땐 너무나도 고마웠고 행복했고 따뜻해 했었다. 그 친구도 많이 불안해하는 상황에서 내게 그렇게 말해주는 것이 너무나도 좋았다. 그런데, 이번엔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피식 비웃고 말았다. 그 수많은 사랑의 속삭임들이 과도하게 분비된 호르몬이 뱉어낸 말들에 불과했던것만 같았다. 얼마나 허무한지, 얼마나 무의미한지.

그래도, 결국 중요한건 그 말의 의미의 진실성이 아니라 그 말을 했던 그 순간의 마음의 진실함일 것이다. 그 정도의 말을 할 정도로 그 순간엔 뜨겁게 사랑했다는 점, 먼 미래도 약속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순간엔 진실했다는 점. 말 하나하나에 너무 과한 의미를 부여지는 않되, 그렇다고 너무 허무하지도 말자. 그 순간에 충실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4
작년 가을학기, 틀어진 여자친구와의 관계를 나는 왠만하면 되돌리고 싶었다. 나는 다시 잘 해보고 싶었고, 힘들겠지만 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혹은 믿고 싶었다.)

전화상의 대화로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에 곧 맞이하는 방학에 만나서 해결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겨울방학에 그 친구를 만났다. 다시 시작하자는 나의 말에, 그 친구는 무척이나 혼란스러워 했던 것 같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했던 말이었기 때문일까. 다듬어지지 않은, 아픈 말들이 많았다. - 솔직히 나는 네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다. 한국에 왔을때 만날 여자를 만들어놓고 싶어서 이러나 싶은 생각도 든다. - 정도의 말들까지도 들었던 것 같다. 내 입장에서 충분히 기분나쁠 수 있는 말이었지만, 그 말들 까지는 정말 모두다 이해했다. - 딱 까놓고 말해서, 저 말이 백프로 틀린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결국 결정적이었던건, 이 말이었다. -
네가 물론 유학을 가서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곳에서 고생하겠지만, 사실 어떻게 보면 유학이라는게 남들은 가고 싶어도 못가는 건데 너는 네가 잘나서 간거고, 그런 면에서 너의 힘듬이라는 것이 배부른 힘듬이 아닌가.

멍했다. 친구들이 마냥 미국갔다고 부러워하며 그런 말을 했을땐 웃어 넘겼었다. 그치만, 세상에서 나를 가장 온전하게 이해한다고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친한 친구들에게도 가족에게도 아꼈던 힘든다는 말을, 그것도 너무 해대면 무거워할까봐 아껴아껴가면서 몇번만 말했었는데, 나의 그런 말들이 너에겐 그정도의 의미 뿐이었구나. 차라리 다른 남자가 생겼다는 말이 더 듣기 좋았을 것 같았다. 어릴때부터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아무리 친해도 내 속을 온전히 열어보이면 안된다고 생각해왔던 나에게, 하나님조차 믿지 못했던 나에게, 사랑은 절대자이자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족이었다. 그런 믿음으로 만난 그 친구였고, 나는 정말 내 마음을 온전히 열었었다. 아무리 친해져도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들, 생각들, 마음들 그 모두를 열었던 사람이었는데,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나를 가장 잘 이해한다고 믿었던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이 이해한 나의 아픔이라는 것이 고작 저정도의 깊이였구나.

배부른 아픔일거라는 생각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었다. 아마 그 친구가 속으로만 저런 생각을 했다면 이해했을 거다. 나도 그 친구가 힘들다고 했던 말들을 온전히 함께 아파한 것은 아니었을 테니까. 그리고 남의 아픔을 모두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아니까. 하지만, 그걸 입 밖으로 말했다는 것을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큰 의미없이 뱉어진 한마디였을수도 있고, 본인이 학부유학을 와본것도 아니니까 모르는게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떤 정황이었든 간에 그런 말을 나에게 내뱉었고, 그 사실 하나로도 그 친구가 나를 얼마나 이해하지 못하는가를 알기엔 숨막히게 충분했다. 그건 나를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을때에야 나올 수 있는 말이다. 그 친구도 정말 너무 힘들었고, 나한테 섭섭했겠지만, 그 말 만큼은 내겐 해선 안되는 말이었다. 심장이 뚝-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카페 안의 공기가 쩍- 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내가 정말 이 사람을 잘못 생각하고 있었구나.

몇초간의 침묵 후에, 도무지 태연한척 할 수가 없어서, 자리를 벌떡 일어나 나와 그 친구의 찻컵을 들고 새 차를 받으러 갔다. 그리고 마음을 다잡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다시 시작하고자 했던 나의 마음을 정리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충분한 한마디였다. 그렇게 다시 자리로 돌아와서는, 나는 마냥 웃으며 이런 저런 농담이나 주고 받다가 그냥 헤어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 아. 결국은 인생 혼자사는 거구나. 세상에 믿을 사람 정말 아무도 없구나. 남의 아픔을 이해한다는 것이 하는 척에 불과한 거구나. 남을 아픔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오만한 자세인가.

그 이후의 며칠간 나는 그 말 한마디의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것 같다. 그 며칠간 만난 나를 아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내가 뭔가 이상하다고 했다. 어딘가 한켠에 정신을 놓고 있는거 같다고. 하지만 나는 그 말을 고마워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젠 미련 없이, 깔끔하게 잊을 수 있겠지.

만병통치약이라는 시간이 많이 흘렀다. 덕분에 이젠 작년의 그 아픔들에 대해 웃으며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부정적이기만 했던 그 생각들도 이제 - 인간이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도, 완전히 이해해 보겠다는 자세만큼은 유지하자. 이해할 수 없는게 현실이라면, 이해의 정도가 아닌 이해하려는 자세가 결국 중요한 것이겠지 - 정도의 생각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젠 그 당시의 내 자신에 대해 생각해보면 웃음이 나게 되었다. 나는 뭘 그렇게 힘들어했고, 고작 말 한마디에 뭘 그렇게 상처받은 걸까. 그 친구가 날 이해하지 못하는건 당연한 거였는데. 안겪어봤으니까 알리 없잖아.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이젠 머리로 이해가 간다 해도, 그 순간 가슴이 받았던 감정과 상처는 잊혀지지 않는 법이다.



#5
이번 학기 시작하면서, 아는 장거리 연애 커플이 대여섯 정도 있었던거 같다. 솔직히 난 속으로 - 한두달 있음 다 깨지겠지, 길어야 한학기다 - 정도로 비웃었다. 하지만, 마음 한켠에서는 정말 끝까지 계속 잘 지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연인들이 있길 바랬다. 정말 특별하다고 생각한 나의 사랑이 물리적 거리에 져버리는 모습을 보고 나자, 나는 부족한건 [내 사랑]이었지 [사랑]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누군가 증명해 주길 바랬다. 그래서 나의 비웃음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역시나, 다들 헤어지네.

친한 누나 하나가 그렇게 얼마전 한국에 있는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그 누나와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과거의 나는 어떤 남자친구였을까 많이 궁금해졌다. 장거리 연애라는 현실 속에서라도 과연 나는 최선을 다했는지, 시간이 흐른다면 남자는 변한다는 비난에서 과연 나는 자유로운지.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이건 내가 아니라 상대방이 판단하는 문제니까.

과거의 나의 문제점을 파악해야 앞으로 좀더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등등의 각종 자기 합리화를 거친 후에 결국은 전화를 걸어 물어봤다. 그리고 나는 최선을 다 했고 변하지 않았다는 대답을 들었다. 정녕 그게 듣고 싶은 대답이었을까? 기분이 묘했다. 도데체 나는 무슨 말을 듣고 싶었길래 이런 말도 안되는 전화를 건 걸까. 헤어진 후에 남자가 할 수 있는 찌질한 짓도 정말 다 해보는 구나.

그리고 내 자신이 참 비겁하다는 생각을 했다. - 말로는 늘 헤어짐의 궁극적 이유는 내가 유학온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나는 어떻게든 내 잘못이 없다고 증명해내고 싶어하는 구나. 내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어 하는구나. - 얼마나 비겁한 생각들인지. 부끄러웠다. 결국은 내 자신에게 좀더 실망하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던 걸까.



#6
여자문제에 있어서, 남자가 쿨하다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쿨하다는 것은, 어떤 면에선 겁이 많다는 뜻이다. 거절당하거나 꼬이는 것에 대해선 두려워하지 않는 다는 점에서 찌질한 단계는 벗어난 거겠지만, 그래도 다가올 아픔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여전히 올인하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겁이 많다는 거다.

겨울방학의 그날, 그 친구를 만나서 다시 시작하자고 붙잡으려 했던 말 중에는, - 내년엔 카투사도 지원해서 꼭 되서 한국에 들어올테니까 그렇게 또 만나고 하면 안되겠냐 - 는 말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찌나 부끄럽고 우습고 어린 말이었는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때 어떻게 저런 말까지 했을까.ㅎㅎ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땐 그렇게 내 바닥을 보이는 것에 대해 겁이 없었다는 점에서 그립기도 하다. 다시 그렇게 내 바닥을 드러낼 용기를 낼 수 있을까.

그 친구와는 헤어졌지만, 어찌됬든 카투사는 지원했다. 지원여부를 고민할때, 그리고 발표가 임박해 올때 저 말이 자꾸 생각났다. 그 여자친구가 그리워서 였던건 아니다. 다만 그때의 내 자신이 묘하게 그리울 뿐.



#7
며칠전 카투사 결과가 나왔고, 나는 떨어졌다.ㅎ 사실 군대가 정말 너무나도 가고싶다. 모든 남자가 가는 곳 나도 가야 떳떳할 수 있지 않을까 - 하는 (혼자 오바하는) 묘한 부채의식과 함께 지금 당장의 현실을 회피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뒤엉키면서, 그저 눈 딱감고 군대 갔다오고 싶은 생각이 많이 든다. 현역으로라도 갈지, 나중에 전문연구요원을 할지, 다시한번 잘 생각해봐야겠지. 과연 어떻게 하는게 잘 하는 걸까. 군대를 갈까.



그런데 세상아, 이런 생각만 하고 사는 내가 사실 참 부끄럽다.
2008. 6. 8. 17:41

인턴을 시작한지 일주일이 되었다. 내가 배정된 프로젝트는 레이저에 관한 것인데, 덕분에 아직까지는 각종 레이저 관련 안전교육이나 눈 검사 등을 치루느라 별다른 특별한 것을 하지 못했다. 다음주부터는 본격적으로 뭔가 배우고, 실험하고 하게 될 것 같다.

5/19 - 5/31 - 이타카에서
심타 졸업여행을 다녀오고 인턴시작하기까지 생긴 2주간의 시간은 대부분 범준이형과 뒹굴뒹굴 빈둥빈둥하며 보냈다. 매일 10시간씩 꼬박꼬박 자고, 10시간 못채우면 낮잠으로 채우고, 같이 맥주마시고 얘기하고 밥먹고 운동하며 보낸 열흘 가량이었다. 그리고 졸업식까지 학교에 남아 있었던 덕분에, 졸업을 앞둔 많은 심타 선배들과 즐겁고 좋은 얘기들을 나눌 수 있었고 그들을 좀 더 많이 알게 된 것 같다. 특히 범준이형이랑은 너무 친해져버렸다. ㅋㅋㅋ 뭐 좋은게 좋으거지 뭐 ㅋㅋㅋㅋ 범준이형은 참 좋다. 형에대해 겉만 아는 사람들은 쉽게 평가할지 모르겠지만, 정말 열심히 살고 근성있는 형이다. 그리고 난 열심히 살고 근성있는 그런 사람을 좋아한다.

5/31 토요일 -  인턴하는 시카고로 가는길
시카고로 오는길, 필라델피아를 경유하도록 예약되 있었는데 이타카에서 출발하는 비행기가 연착되서 필라델피아에서 타기로 된 비행기를 놓치지나 않을까 많이 걱정했었다. 혹시나 했던 연착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필라델피아발 시카고행 비행기가 이륙하기 20분 전에 게이트에 도착해서는 몇몇 사람들이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국내선이라 아직도 입장을 시작하지 않았나보다-라고 생각하며 멍하니 앉아있다가 가만히 눈앞에서 비행기를 놓쳐버렸다. ㅡ.ㅡ;; 다음 비행기 티켓으로 바꾸고 (다행이 추가 비용은 없었다), 점심을 먹고, 기다리다가, 비가 내리던 날씨로 인해 그 비행기도 1시간 늦춰져 예상했던 것보다 시카고엔 3시간 가량 늦게 도착해버렸다. 그냥 웃겼다. 나 참, 천하의 윤종민이 이런 멍청한 일을 다 겪는 구나. 좋은 경험이었지 뭐.
페르미랩에서 예약해준 리무진 서비스는 너무나도 좋은 차를 몰고 왔고(거의 에쿠스 급이었다) 도착한 아파트도 생각보다 너무 좋았다. 좋은 매트리스에 시트와 이불이 깔려져 있는 바람에 가져온 이불과 배개가 무색해졌고, 각종 식기도구가 모두다 갖추어져 있는 것에 매우 안도했다.

6/2 월요일 - 인턴 첫날
첫날은 그저 각종 서류 처리와 끝없는 안전교육으로 잔뜩 지쳐버렸다. 그런 일정 끝에 멘토와 만나는 시간이 있었는데, 나의 멘토가 중국인 유학생이길레 솔직히 많이 실망해버렸다. 전체 인턴중에 유일한 아시아인인 나에게 전체 멘토중에 유일한 아시아인이 배정되었다는 사실은 우연치고는 참 웃겼고, 멘토의 이름을 미리 알았으므로 그가 중국인이라는 사실에는 놀라지 않았지만, 중국계 미국인이 아니라 대학까지 중국에서 마쳤을 것이 분명한 중국식 액센트와 어색한 발음 어색한 영어를 구사하는 토종 중국인이라는 사실은 좀 꽤나 많이 실망하게 만들었다. 나 스스로도 아직 영어가 미숙한 아시아인인 주제에 영어에 능수능란하고 유머러스한 백인을 바라고 있는 내 자신도 참 웃기지만, 뭐 내가 인종[구별]적인걸 어떡하겠는가. 사실 게다가 이왕이면 좋은 학부를 나오고 좋은 대학원을 나온 사람이어서 인맥적으로 나중에 도움이 됬으면 하는 매우 기회주의적인 기대까지 하고 있었던 나다. 딱 까놓고 얘기해서 그러한 조건을 만족하는 멘토이어야 내가 얻을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것이 더 많을 테니까 그런 내가 별로 부끄럽진 않다. 그치만 딴것보다도, 영어만 모국어처럼 구사하는 중국인이었다면 별 실망 안했겠지만 그게 제일 아쉬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러한 나의 바램과 불평불만은 어디까지나 주가 아닌 덤일 뿐이니까, 좋게좋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6/6 금요일 - 그룹 미팅
내가 속한 그룹의 미팅이 매주 금요일 오후마다 있다. 서로 토론하는 물리 내용을 잘 몰라서 그저 멍하니 앉아있었다. 하지만 이런게 회의라는 것이구나, 이런걸 직장에서는 하는구나, 이런 연구소에서 하는 형태는 일반적인 경우와 좀 다르겠지만 어쨌든 요런 종류의 것이 회의라는 것이구나 라는 것을 느꼈다. 덧붙여 같은 실험실을 공유하는 물리학자들이 서로 약간씩 다른 연구 주제에 대해 서로 토론하고 의견을 주고 받는 모습이, 꽤나 멋있어 보였다. 여러명의 어른이 서로 물리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그 전엔 본 적이 없었거든.



영어
벌써 유학 1년차가 되었지만, 항상 영어만 사용할 수 있는 환경에 대한 묘한 부채감이 있었고, 덕분에 이번 인턴 기간동안 만큼은 영어만 써야 한다는 사실이 참 반가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너무 답답하지는 않을까. 애들이랑 잘 어울리지 못하는 건 아닐까. 그런데 일주일 살아보니, -아, 이제 내가 정말 미국에 어느정도 적응하긴 했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처음 미국와서 느꼈던 그런 불안함과 답답함도 없고, 그냥 애들이랑도 잘 지내고 잘 놀고 떠들고 같이 밥해먹고 출근하고 있다. 한 아파트에 4명이서 같이 살고 있는데, 둘은 괜찮은 애들이긴 한데 하나는 정말 제대로된 [영재] 혹은 [geek, nerd] 혹은 [재수없는 잘난척 하는 녀석]이다. 그런데 그게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걔를 제외한 나머지 세명이서 계속 걔 뒤땅까면서 놀고 있기 때문에 ㅋㅋㅋㅋ 영어로 소통하는 것이 이제 그닥 답답하지는 않은 수준에 이르렀고, 나랑 대화하는 친구들도 그닥 답답하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아직 내가 서사를 풀어내지는 못한다는 것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친구들이 하는 얘기를 이해하고 맞장구치고 한번씩 대화하고 하는 것은 이제 잘 되지만, 자 들어봐-하며 내가 이야기를 풀어놓기에는 많이 답답했다. 그리고 나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아니라 이야기를 주도하는 사람이다. 다시한번 영어공부에 대한 열의가 불타오른다. 그들과 기회가 있을때는 절대 빼놓지 않고 열심히 대화하고 놀고 어울려야지. 그리고 따로 영어공부를 하자. 아예 스크립트를 통째로 외우는 거다. 결국은 멍청하고 묵직한 방법이 승리한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미국까지 왔는데, 공부라는 토끼만 잡으면 아무래도 섭섭할 것 같다. 영어는 원어민이 되겠다. 반드시.

하지만, 아무리 영어에 많은 노력을 붓는다 해도 절대 영어와 한국어를 섞지는 않겠다. 평상시 말할때 그 둘을 섞어 쓰는 것은 이미 매우 싫어했지만, 내가 한국말로 한국말 할 줄 아는 한국인한테 말 걸었는데 상대방이 영어로 대답할때의 그 이질감과 어의없음과 당황스러움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당연히, 다른 미국 사람들과 함께 대화할때는 한국사람과도 영어로 대화해야 겠지만, 1:1 대화에서 한국인끼리 영어를 사용한다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미국에는 정말 이상한 방향으로 미국화된 한국인이 너무 많다. 딱히 다른 이유가 있는게 아니라 영어가 너무 익숙해져서 그러는 것일 뿐이라고? 근데 난 그게 싫다는 거다. 나는 절대 섞지는 않겠다. 영어로 말할때는 영어만, 한글을 말할때는 한글만.



미국식 생활
그리고 미국애들은 정말 한국애들과 다르다. 어찌나 개인주의적인지.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어색하다는 얘기다. 한날은 같이 사는 넷이서 함께 마트에 가서 장을 봤는데, 각자 장을 보고 각자 계산해서 각자 요리하고 각자 설거지하고 지낸다. 한번씩 요리도 해주고 설거지도 같이하고 하지만, 주로 [각자] 식이라는 거다. 각자가 각자의 것을 산 덕분에, 지금 냉장고엔 1갤런 짜리 우유가 무려 4통이나 있다. 남 신경 안쓰고 살기엔 매우 편하긴 하겠지만, 역시 이건 아무래도 한국인이 할만한 짓이 아니다. 한국인은 한국식으로 살아야지. 그나마 하기 쉬운 베이컨&에그 샌드위치 정도는 여러개 만들어서 같이 먹자고 했다. 한국 음식을 해 줄 수 없다는 게 조금은 아쉬웠는데, 오늘은 반갑게도 마트에서 신라면과 짜파게티를 발견해서 잔뜩 사가지고 왔다. 내가 해먹을때 같이 해서 나눠먹고 그래야지. 그들의 개인주의의 선은 내가 침범하면 안되겠지만, 그들이 그렇게나 개인적일수록 내가 비개인적으로 행동한다면 더 큰 울림으로 그들에게 다가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른바 [한국식]인거다. 미국에서는 철저한 미국인으로 살아가고 싶지만, 바람직한 한국적임은 잃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나의 한국적임이 어떤 부분에서는 인간관계의 무기가 될 수도 있다. -  아무튼 요즘 절대 해본적 없는 요리를 이것저것 시도해보고 있다. ㅋㅋ 말그대로 정말 [다양한] 경험중이다.



인턴쉽
내가 배정된 프로젝트는 레이저를 사용하는 곳이었는데 - 페르미랩에서 인턴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하는 일은 입자물리나 가속기와는 전혀 무관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입자물리에 아직까진 전혀 관심이 없는 나로써는 이게 좋은 일인 것 같으면서도, 조금은 아쉽기도 하다. 이번 일주일은 각종 레이저 안전교육과 눈 검사 등으로 시간을 보내서 아직은 잘 모르지만, 맛배기로나마 접한 나의 프로젝트를 통해서 다시한번 내가 미리 공부해놓고 익혀놓은 것들은 어떻게든지 나중에 쓰인다는 사실을 느꼈다.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나의 과거의 공부들이 지금의 프로젝트와 연관되어 있었다. 수학, 물리는 최고가 되고, 프로그래밍은 누구보다도 뒤지지 않을 정도의 수준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어떻게든 지금의 노력과 희생은 나의 미래에 도움이 될 것이다. 내 중학교 시절이 지금까지 나를 지탱하고 도와주고 있는 것처럼. (이제 좀 바닥나고 있는 것 같지만...ㅠㅠ)

멘토의 어색한 영어는 그렇게 아쉽지만은 않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주어지 현실은 인정하되, 최대한 앵기고 노력하고 잘보이고 뽑아낼대로 뽑아내자. 결국은 이것이 정답인걸.

10주간의 인턴 경험은 물리라는 학문적으로나, 영어적으로나, 또 일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배우는 것에 대해 많은 경험이 될 것 같다. 벌써 근무중에 적당히 인터넷이나 하고 facebook, 싸이, 블로그, 미디어 다음 기사등을 떠돌며 근무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어떤건지를 느끼고 터득해버렸다. ㅡ.ㅡ;; 앞으로의 10주가 꽤나 기대된다. 무엇을 더 겪고 느끼게 될까.



믿음
길고 긴 방황끝에 이제 정말 정신 좀 차린 거 같다. 다시 달릴 수 있을 것 같다. 지난 4년간의 그 끝없었던 곁눈질의 과정은 다시 내가 앞만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한국에서 쇠고기에 촛불에 시끄러운건 알지만, 이곳에서 내가 그것에 지나친 관심을 갖고 신경쓰는건 적극적 참여가 아닌 곁눈질일 뿐이고, 양심에 대한 어줍잖은 자위행위일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이곳에 왔고, 이곳에 온 이상 나의 현실에 집중하고 이 현실을 최대한으로 활용하고 뽑아내서, 나는 그저 나중에 갚으면 되는 것이다. 부채의식을 잃어서는 안되겠지만, 내가 처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것도 바보같은 짓이다. 내가 할일이 있고, 다른 사람들이 할 일이 있다.

내가 해 낼 수 있을까, 하는 의심과 불안함에 꿈을 낮추고 안정적인것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생각은 이제 사라졌다. 결국은 그 어느것도 쉽지 않고 그 어느것도 안정적이지 않고, 그 어느 것의 미래도 불안하다. 그 수많은 진로와 미래에 대한 문제는 끝에 이르면 하나의 질문에 도달하더라. - 나 스스로를 믿을 수 있는가, 나는 정말 뭔가 해낼 수 있는 놈이라고 끝까지 믿을 수 있는가. 내가 뭔가 해낼 수 있는 가를 의심하는 것은 답이 없는 문제다. 그리고 그 답없는 문제에 의문을 갖는 단계는 졸업할때가 됬다. 결국은 내가 해낼 수 있다고 [믿는가]의 차이다. 답은 아무도 모른다. 게다가 내가 해낼 수 있다 해도, 언제 해낼 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저 믿는 것이다. 4년간의 불안함, 두려움, 허무함, 그리고 방황은 나에게 이 결론을 주었다. 어줍잖은 자기경영서나 주변의 충고조언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제는 가슴으로 느낀다. - 나는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믿자. 그러니까 겁내지 말고 달리자. - 무언가 나름 많이 이뤘던 중학교 시절과 지금의 나의 차이는 저 두가지 생각 뿐이다.

믿음이 흔들릴땐 지금 99도라고 믿자. 조금만 더 달리면 이제 끓을거라고. 99도에서 멈추긴 아깝지 않냐고.




6/7 토요일엔 인턴중의 일원인 Jennifer의 집이 위치하는 St. Charles의 Riverfest에 다들 함께 놀러갔다가, Jenn의 집에서 바베큐하고 떠들고 놀았다. 거기서 다들 같이 찍은 사진 한장. 그러고 보니 프로필 사진 외에는 처음으로 블로그에 내 사진을 올리는 것 같다.ㅎㅎ (클릭하면 크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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