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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7. 15. 13:40
[전시/미국]
일요일, 시카고의 Museum of Contemporary Art를 다녀왔다.
처음 봤을때에는 이런 풍선 작품은 어떻게 보관할까 하는 괜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 터질 위험도 크고 안의 공기도 잘 빠질텐데, 정말 관리하기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팜플렛을 읽어봤더니 작품의 재질이 알루미늄, 혹은 철이었다. 아주 견고하고 단단한 작품이었고, 그저 표면에 마치 풍선인것처럼 주름을 잡고 투명페인트로 반짝거리는 효과를 만듦으로써 흔히 보아왔던 그 헬륨넣은 놀이공원 풍선인양 보이는 것일 뿐이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알루미늄이라는 설명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살펴봐도 여전히 풍선처럼 보여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었다. 손으로 만져보면 금방 확인 할 수 있을테지만, 물론 그건 허락되지 않았다. 어떤 시각적 이미지에 대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경험, 혹은 인상이라는 것이 나의 판단에 이렇게나 큰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작가가 이 작품들을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아마 다른 것이었겠지만, 작품은 나에게 미리 알고 있는 지식에 의존하는 것이 때때로 부정확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불편한 진실이 만져서 실체를 확인해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상황과 같이 버무려지면서 뭔가 마음 한켠이 근질근질하게 했다. 그리고 그 가려움은 작품 감상의 묘한 즐거움이 되어버렸다.
같은 작가의 다른 작품이다. Jeff Koons는 이 두 작품처럼, 어린 시절의 동심을 상징하는 것과 성적인 것을 같이 배치해 놓은 작품을 많이 만들었다고 한다. 어릴 적의 나였다면 핑크팬더와 티티가 먼저 눈에 들어왔겠지만, 지금의 내 눈엔 손으로 가려진 가슴, 혹은 어깨선과 등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나서야 핑크팬더와 티티가 눈에 들어온다. 서로 반대쪽 끝에 위치하던 두가지를 섞어놓은 이 작품 또한 뭔가 마음 한켠이 불편해지게 만들긴 하지만, 사실 이제 이런 건 좀 식상하다.
처음 이 두 사진을 보았을때, 한참동안 두 사진이 어떻게 다른가를 찾아보고 있었다. 몇분을 쳐다보며 비교했는데, 차이점이 전혀 눈에 보이지 않았다. 뭐야, 같은 사진 그냥 두 장 인쇄해서 붙여놓은거 아냐? - 라고 투덜거리며 지나치려는 그 순간, 어떻게든 다른 점을 찾아내려고 애썼던 내 행동 또한 [당연한] 것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우리는 (혹은 나는) 비슷한 두 사진을 봤을때 그냥 - 비슷하네 - 혹은 - 같은 사진인가 보네 - 하고 넘기지 않고, 어떻게든 차이점을 찾아내서 비교 분석하려고 하는 걸까. 서로 같은 점보다는 서로 다른 점을 이야기하는 것이 익숙하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일 것이고, 덕분에 그런 방법으로밖에 감상할 줄 모르게 된 것 아닐까. 같은 걸 같다고 그냥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떻게든 다른 점을 찾아내려고 애쓰고 있는 내 자신이 갑자기 안타까웠다.
(방에 돌아와서 인터넷을 검색해본 결과, 사실 다른 점이 있긴 있었다. 한 사진에서는 엄마로 짐작되는 여자가 퍼즐 조각을 집고만 있고, 다른 사진에서는 그 퍼즐 조각을 약간 집어 올리고 있다고 한다. 여기 올린 파일 상으로는 구분되지 않지만, 실제 전시장의 큰 사진에서는 구분된다고도 했다. 사실 작가의 의도는 이런 미세한 차이점을 제외하곤 완전히 동일한 두 사진을 전시함으로써 감상자로 하여금 사진을 스쳐지나가며 보는 수동적인 감상이 아닌, 무엇이 다른지를 하나하나 찾아보는 능동적인 감상을 유도하려는 것이었다고 한다. 작가가 생각하는 사진이라는 매체의 의미는 내가 생각해온 의미와는 매우 상반되는 것인 듯 하다.)
현대 미술을 점점 더 많이 접하면서 느끼는 하나의 공통점은, 현대미술이 미술은 고상하고 수준높은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려고 많이 애쓰고 있다는 점이다. 숭고하고, 장엄하고, 성스러운 것만이 미술이 아니라, 아주 값싼 대중문화, 키치적인 것들, 외설적인 것들 까지도 다 미술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작업의 의도 중 하나는 귀족들의 전유물이기만 했던 미술을 수많은 대중도 즐길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던데, 그 목적이 과연 달성되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한 시도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을 미술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미술가들이 하는 미술, 혹은 우리가 미술관에서 만나는 미술로 범위를 국한시켜 얘기한다면, 그 존경받던 위치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미술이 오히려 대중과 멀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미술이 이젠 [나도 저런거 충분히 만들 수 있다]정도로 대중에게 인식되어지고, 덕분에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졌고, 결국 더욱더 그들만을 위한 미술이 되어버린게 아닐까. 우러러볼 미술이 사라진 지금 일반 대중과 미술가 모두가 우왕자왕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렇게 우상을 잃어버린건, 비단 미술영역 뿐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관람을 마치고, 시카고 Water Tower 옆의 벤치에 앉아서 만나기로 했던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벤치 앞에는 사람을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는 도시의 비둘기답게, 어떤 비둘기 한마리가 바닥에 들러붙은 껌을 쪼아먹고 있었다. 그 비둘기에 대한 감상으로부터 우연찮게 내 옆에 앉아있던 어떤 아주머니와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비둘기들이 너무 비위생적이라는 불평부터 시작해서, 시카고 도심에서 박쥐도 보인다는 얘기로 넘어갔다가, 종교, 영성(靈性), 결국엔 작년에 발간된 어떤 한 책의 아인슈타인에 대한 글귀까지로 대화가 흘렀다. 시간이 되어 그 아주머니와 서로 가볍게 인사하며 헤어진 후엔, 한 한국인 관광객 커플이 내 옆옆에 앉아있던 백인 아저씨가 찍어준 사진을 마음에 안들어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사진 찍어 드릴까요?] 라고 말했더니, 두 분은 나를 매우 반가워하며 영어로는 차마 말하지 못했던 여러가지 주문들 - 허리 위로만 나오게 해서 뒤에 있는 건물까지 사진에 다 보이게 이렇게 저렇게 찍어주세요 - 을 쏟아냈다. 고맙게도, 두 분 다 내가 찍은 사진에 많이 만족해 하셨고, 서로 손을 꼭 잡고는 걸어가셨다. 잠깐의 만남, 잠깐의 대화들이었지만, 너무나도 좋았다. 그리고 너무나도 여행이 가고 싶어졌다. 그래, 이런게 여행이지.
Jeff Koons, Balloon Dog (Orange), 1994-2000. |
Jeff Koons, Rabbit, 1986. |
그런데 알루미늄이라는 설명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살펴봐도 여전히 풍선처럼 보여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었다. 손으로 만져보면 금방 확인 할 수 있을테지만, 물론 그건 허락되지 않았다. 어떤 시각적 이미지에 대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경험, 혹은 인상이라는 것이 나의 판단에 이렇게나 큰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작가가 이 작품들을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아마 다른 것이었겠지만, 작품은 나에게 미리 알고 있는 지식에 의존하는 것이 때때로 부정확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불편한 진실이 만져서 실체를 확인해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상황과 같이 버무려지면서 뭔가 마음 한켠이 근질근질하게 했다. 그리고 그 가려움은 작품 감상의 묘한 즐거움이 되어버렸다.
Jeff Koons, Pink Panther, Porcelain, 1988 |
Jeff Koons, Titi, Oil on canvas, 2003 |
Sharon Lockhart, Maja & Elodie, Photographs, 2003
(방에 돌아와서 인터넷을 검색해본 결과, 사실 다른 점이 있긴 있었다. 한 사진에서는 엄마로 짐작되는 여자가 퍼즐 조각을 집고만 있고, 다른 사진에서는 그 퍼즐 조각을 약간 집어 올리고 있다고 한다. 여기 올린 파일 상으로는 구분되지 않지만, 실제 전시장의 큰 사진에서는 구분된다고도 했다. 사실 작가의 의도는 이런 미세한 차이점을 제외하곤 완전히 동일한 두 사진을 전시함으로써 감상자로 하여금 사진을 스쳐지나가며 보는 수동적인 감상이 아닌, 무엇이 다른지를 하나하나 찾아보는 능동적인 감상을 유도하려는 것이었다고 한다. 작가가 생각하는 사진이라는 매체의 의미는 내가 생각해온 의미와는 매우 상반되는 것인 듯 하다.)
현대 미술을 점점 더 많이 접하면서 느끼는 하나의 공통점은, 현대미술이 미술은 고상하고 수준높은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려고 많이 애쓰고 있다는 점이다. 숭고하고, 장엄하고, 성스러운 것만이 미술이 아니라, 아주 값싼 대중문화, 키치적인 것들, 외설적인 것들 까지도 다 미술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작업의 의도 중 하나는 귀족들의 전유물이기만 했던 미술을 수많은 대중도 즐길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던데, 그 목적이 과연 달성되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한 시도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을 미술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미술가들이 하는 미술, 혹은 우리가 미술관에서 만나는 미술로 범위를 국한시켜 얘기한다면, 그 존경받던 위치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미술이 오히려 대중과 멀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미술이 이젠 [나도 저런거 충분히 만들 수 있다]정도로 대중에게 인식되어지고, 덕분에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졌고, 결국 더욱더 그들만을 위한 미술이 되어버린게 아닐까. 우러러볼 미술이 사라진 지금 일반 대중과 미술가 모두가 우왕자왕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렇게 우상을 잃어버린건, 비단 미술영역 뿐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관람을 마치고, 시카고 Water Tower 옆의 벤치에 앉아서 만나기로 했던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벤치 앞에는 사람을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는 도시의 비둘기답게, 어떤 비둘기 한마리가 바닥에 들러붙은 껌을 쪼아먹고 있었다. 그 비둘기에 대한 감상으로부터 우연찮게 내 옆에 앉아있던 어떤 아주머니와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비둘기들이 너무 비위생적이라는 불평부터 시작해서, 시카고 도심에서 박쥐도 보인다는 얘기로 넘어갔다가, 종교, 영성(靈性), 결국엔 작년에 발간된 어떤 한 책의 아인슈타인에 대한 글귀까지로 대화가 흘렀다. 시간이 되어 그 아주머니와 서로 가볍게 인사하며 헤어진 후엔, 한 한국인 관광객 커플이 내 옆옆에 앉아있던 백인 아저씨가 찍어준 사진을 마음에 안들어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사진 찍어 드릴까요?] 라고 말했더니, 두 분은 나를 매우 반가워하며 영어로는 차마 말하지 못했던 여러가지 주문들 - 허리 위로만 나오게 해서 뒤에 있는 건물까지 사진에 다 보이게 이렇게 저렇게 찍어주세요 - 을 쏟아냈다. 고맙게도, 두 분 다 내가 찍은 사진에 많이 만족해 하셨고, 서로 손을 꼭 잡고는 걸어가셨다. 잠깐의 만남, 잠깐의 대화들이었지만, 너무나도 좋았다. 그리고 너무나도 여행이 가고 싶어졌다. 그래, 이런게 여행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