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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6. 25. 06:32
[영화]
혈의 누
감독 김대승
출연 차승원 박용우
2009. 06. 21. 일요일 오후 8시
시티홀에서 출발한 차승원에 대한 관심으로 찾아 본 영화 중 마지막으로 본 영화다. 대충 19세기 조선에서 영화 [세븐]이 펼쳐진다고 생각하면 되는 줄거리인데, 사극이라는 장르 내에서 범죄 수사물을 시도하는 것이 무척 신선했고, 상세한 고증도 좋았다. 거기에 단순한 사극인 것이 아니라 근대로 넘어오는 19세기의 조선을 배경으로 한 덕에 드러나는 시대의 과도기적 특징들도 재미있었고, 또 그러한 부분들이 단순히 극의 배경으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핵심 줄거리를 관통하고 있는 것이 꽤나 맘에 들었다. 2005년의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새롭고 신선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고, 약간은 우리 영화에 대한 자부심도 가지게 해 주었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쳐지는 상황 전개가 약간은 지루하기도 했다. 그리고 재밌게도, 지금 시티홀에선 차승원과 정략 약혼한 사이로 나오는 김세아가 극중 주요 피해자 중 한명으로 등장한다 ㅋㅋ
사실 정작 하고 싶은 얘기는 -
영화 속에서 이원규(차승원)가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질문을 김인권(박용우)에게 소개해 주는 장면이 있다.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으면,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뜨끔 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저 대화를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전 연극 코펜하겐에 관한 글에서 했던 과학의 가치중립성에 관한 얘기가 떠올랐다. 저 질문에 대해 34섬이라고 대답하면 수학자가 되고, 보리를 받지 않아야 한다고 대답하면 군자君子가 되는 것일거다. 순수한 학문이라 할지라도 그 밑에는 '인간'이 가장 중요한 전제가 되어야 하는 건데, 현실에의 끈을 놓은 채 (혹은 잘못된 현실과의 끈을 가진 채) 학문의 영역 내에서만 살아가다 보면 어느덧 시야는 좁아지고 나도 모르게 지주가 34섬을 받아야 한다고 결론짓게 될지도 모른다. 분명 수학은 가치중립적인데, 군자의 도道는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나는 수학자일까 군자일까. 저 대사에 뜨끔했다는 건, 이제 고작 학부 2년을 마친 나조차도 그 학문이라는 우물 속에 어느정도 함몰되기 시작했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을까. 앞으로 내 인생에서 마주칠 수많은 저러한 질문들 앞에서, 나는 과연 군자의 대답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단순히 대답만 하는 것을 넘어서서, 군자로써 행동할 수 있을까.
감독 김대승
출연 차승원 박용우
2009. 06. 21. 일요일 오후 8시
시티홀에서 출발한 차승원에 대한 관심으로 찾아 본 영화 중 마지막으로 본 영화다. 대충 19세기 조선에서 영화 [세븐]이 펼쳐진다고 생각하면 되는 줄거리인데, 사극이라는 장르 내에서 범죄 수사물을 시도하는 것이 무척 신선했고, 상세한 고증도 좋았다. 거기에 단순한 사극인 것이 아니라 근대로 넘어오는 19세기의 조선을 배경으로 한 덕에 드러나는 시대의 과도기적 특징들도 재미있었고, 또 그러한 부분들이 단순히 극의 배경으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핵심 줄거리를 관통하고 있는 것이 꽤나 맘에 들었다. 2005년의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새롭고 신선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고, 약간은 우리 영화에 대한 자부심도 가지게 해 주었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쳐지는 상황 전개가 약간은 지루하기도 했다. 그리고 재밌게도, 지금 시티홀에선 차승원과 정략 약혼한 사이로 나오는 김세아가 극중 주요 피해자 중 한명으로 등장한다 ㅋㅋ
사실 정작 하고 싶은 얘기는 -
영화 속에서 이원규(차승원)가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질문을 김인권(박용우)에게 소개해 주는 장면이 있다.
지름이 60보인 원에 내접하는 정오각형의 밭이 있습니다. 이 밭엔 3평방보에서 수확되는 보리의 양이 30되 인데, 9명의 소작농이 일년 동안 일해 나온 보리의 8할을 지주가 갖게 됩니다. 어느 해 흉년이 들어 이 밭의 3할에서만 보리가 수확되었다면, 지주가 가져야 할 보리는 몇 섬입니까?처음 김인권은 (놀라운 암산 능력을 보이며) 34섬이라고 대답하는데, 이원규는 틀린 답이라고 한다. 영화가 한참 진행되고 난 후 다시 둘은 이 질문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데, 김인권은 자기가 실은 답을 알았다며, 지주가 보리를 받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으면,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뜨끔 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저 대화를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전 연극 코펜하겐에 관한 글에서 했던 과학의 가치중립성에 관한 얘기가 떠올랐다. 저 질문에 대해 34섬이라고 대답하면 수학자가 되고, 보리를 받지 않아야 한다고 대답하면 군자君子가 되는 것일거다. 순수한 학문이라 할지라도 그 밑에는 '인간'이 가장 중요한 전제가 되어야 하는 건데, 현실에의 끈을 놓은 채 (혹은 잘못된 현실과의 끈을 가진 채) 학문의 영역 내에서만 살아가다 보면 어느덧 시야는 좁아지고 나도 모르게 지주가 34섬을 받아야 한다고 결론짓게 될지도 모른다. 분명 수학은 가치중립적인데, 군자의 도道는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나는 수학자일까 군자일까. 저 대사에 뜨끔했다는 건, 이제 고작 학부 2년을 마친 나조차도 그 학문이라는 우물 속에 어느정도 함몰되기 시작했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을까. 앞으로 내 인생에서 마주칠 수많은 저러한 질문들 앞에서, 나는 과연 군자의 대답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단순히 대답만 하는 것을 넘어서서, 군자로써 행동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