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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에 해당되는 글 46건
2009. 9. 14. 00:44
귀국 후 입대 전 3주간 한국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텔레비전 광고는 대한항공 황하편이었다.



사기 이사열전
泰山不辭土壤(태산불사토양) 河海不擇細流(하해불택세류)
태산은 흙을 사양하지 않고 큰 강과 바다는 물줄기를 가리지 않는다.


책 [오래된 정원]의 후기에서 황석영 작가는 이런 말을 했다.

이제 나의 반생을 돌이켜보면 나는 정말로 운이 좋은 사람인 듯한 생각이 든다. 곡절 많은 세월이었지만 나는 글을 쓰든 쓰지 않든 '문학을' 오롯이 살아냈다. 어쨌든 죽는 날까지 작가는 자신의 문학을 온몸으로 사는 것이다. 나의 산전수전은 작가로서의 마음바탕이 되었으리라.



입대한다는 소식에 나보다 더 안타까워하며 내게 말을 건넨 친구들에게 늘 했던 얘기가 있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고. 이때쯤 되면 졸업은 얼마 남지 않았고, 뭔가 구체적이어야 하는데 뭘 해야 할지는 모르겠고, 막연한 두려움 답답함은 지워지지 않고, 그런 현실을 도피하면서 좀 쉴 수 있는 아주 괜찮은 핑계로 군대가 딱이라고 말하곤 했다. 농담투로 뱉은 말이긴 하지만 농담이기만 했던 건 아니다. 대학교에서의 2, 3년 후 입대하는 친구들의 상당수가 저 말에 자유로울 수 없지 않을까.

어찌됬든 나의 지난 2년은 50점짜리였다. 뭣도 모르고 100점을 기대하고 시작했지만 나의 현실은 빵점이었고, 나름의 부단한 노력 끝에 점수를 끌어올리긴 했다지만 그러는 와중에 수많은 현실과 타협해버렸다. 그렇게 결국은 50점이라는 절충안에서 자리를 잡아버린 것 같다. 가끔씩 그런 현실과 내 자신이 몸서리치도록 싫었지만, 나약한 핑계를 대자면 그 속에선 도무지 더 어쩔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주변에서 왜 결국 현역으로 입대하기로 마음먹었냐고 물으면 이렇게 얘기했다. 현역 경험이 없다면 느낄 것만 같은 부채감이 5프로 정도, 군문제를 미리 해결하고 마무리 짓는 것이 더 나은 결정일거라는 생각이 25프로 정도, 그리고 현실도피욕구가 70프로 정도. 제대 후엔 그래도 빵점이 아닌 50점부터 시작하는데, 그때엔 내 타협점을 100점까진 아니라도 90점으로는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물론 2년 후에 돌아간다고 해서 지금의 현실과 그때의 현실이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그치만, 똑같은 급경사의 오르막길이 계속된다 해도, 중간에 평지에서 숨을 한번 고르고 난 후라면 그 길을 좀 더 잘 오를 수 있지 않을까.



초연超然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용감하고 담담하게. 어떠한 믿음이나 신념을 맹신하거나 거기에 함몰되어 버리지는 않으면서도, 염세적이지 않고 긍정적이고 진취적일 수 있는 마음. 나는 내가 온몸으로 세상에 부딪히며 살아가면서도, 과정을 즐겼기에 훗날의 보상을 바라지 않았으면 좋겠다. 말은 되게 거창한데, 짧게 말하자면 -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 하는 마음이었으면 좋겠다는 얘기다. ㅎㅎ



적다보니 출사표마냥 되어버려 좀 멋쩍다.ㅎㅎ 그치만 가벼운 마음으로 향한다.
건강히 잘 다녀올게요.
2009. 8. 22. 17:00
07/18 하이파 Haifa
어떤 면에선 상당히 부산같았던 도시. 해변으로부터 근접한 산 정상까지 걸쳐서 도시가 펼쳐지는 덕에 도시의 가장 높은 곳(즉, 산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경치는 압권이었다. 바하이 정원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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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하이 정원과 하이파 전경



08/19 예루살렘
예수님이 십자가를 끌고 간 길 Via Dolorosa를 따라 걸었다. 예수의 죽음 300년 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인정하자 그의 어머니인 헬레나는 이스라엘을 들러 예수와 관련된 각종 지역들을 찾아내서 성당을 지었는데, 이스라엘 내의 상당수의 유서깊은 성당은 그 시기에 처음 지어진 것들이 많다. 채찍으로 걸음을 재촉당한 곳, 쓰러지면서 벽에 손을 대었던 곳, 그리고 결국 십자가에 못박힌 골고타 언덕까지 크게는 성당이 작게는 예배당이 자리잡고 있었다. 마지막 골고타 언덕엔 성묘교회 Church of the Holy Sepulchre 를 만들었는데, 반동의식이 강한 나로써는 저게 사실은 예수님 무덤이 아니라 딴사람 무덤이면 진짜 대박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산) 근데, 300년이나 지난 후에 찾아낸 건데 그 시절에 무슨 방사선 동위원소를 재봣을 것도 아니고 진짜인지 아닌지 어떻게 확신하겠나..?

재밌는 점은 기독교 내의 각종 종파(카톨릭, 그리스 정교, 시리아, 아르메니아, 등등등)가 성묘교회 내부의 영역을 나누어 소유하고 있고, 분쟁의 소지 덕분에 아침 저녁으로 대문을 걸어 잠구면서 관리하는 것은 이슬람교도에게 맡긴다고 한다. 그 무덤이 실제 예수님 무덤이라고 한들, 저 사실을 알면 아마 예수님이 땅을 치며 안타까워 하실거다.

덧붙여 당연한거기도 하지만 웃기기도 한점은 콘스탄티누스와 그의 엄마 헬레나 모두 카톨릭의 성인이라는 점이다. 콘스탄티누스야 유명한 카톨릭 철학자라고 쳐도, (아주 비꼬아서 얘기하자면) 황제의 엄마라는 본인의 정치적 위치를 이용해 교회 몇개 지은 걸로도 성인이 되는 거 보면 조금 우습기도 하다. 물론 진짜 성인스러우셨을 수도 있다 ^^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라는 성 안나 St Anne을 위해 만든 성당에서는 엉겹결에 한 신부님과 조촐한 대화를 나누었다. 탄자니아에서 20년간 포교활동을 하시다가 이제 십년째 예루살렘에 머물고 계신다던데, 성 안나 성당의 소리울림이 유명하다며 자꾸 노래를 불러보라고 재촉하시는 바람에 머뭇머뭇 하다 결국 애국가 한소절 부르고 말았다...



08/20-21 요르단 페트라 Petra
페트라는 정말 많이 망설인 끝에 방문했다. 가는 길도 험하고 멀 뿐더러 서양 문화와 매스미디어가 쇄뇌시켜놓은 이 이슬람 국가들에 대한 막연한 공포 덕분에 꾸물꾸물 거리다가, - 언제 내가 여기 부근을 다시 오겠어, 좋아 가는거야 - 하고 큰맘먹고 길을 나섰다.

갔다온 지금은 당연히 가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뿐이다. 당연히 그닥 위험할 것도 없었고 (택시기사한테 덤탱이좀 씌이긴 했지만..) 페트라의 경관은 정말 압도적이었다.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 편에서 등장한 덕에 유명해졌고, 몇 년 전에는 신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히기도 한 페트라는, 기원전 6세기경 나바테이아 인들이 사막 한가운데의 바위 산들을 깎아 만든 유적이다. 주변의 황폐한 환경적 조건에 그 유적의 거대함이 더해지면서 고대인에 대한 경외심이 절로 피어나는 곳이었다. 한 달 전 쯤 예루살렘에서 헤제키아의 동굴을 보고 고대인들의 위대함을 생각했던 것이 나바테이아 인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유적은 압도적이었다. 14세기경 잊혀졌다가 19세기 경 스위스 탐험가에 의해 재발견 되었다는데, 그렇게 처음 재발견한 그는 페트라를 보고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호스텔에서 만난 Will이라는 영국 친구와 함께 돌아다니면서 끝도 없이 주절주절 얘기도 많이했다. 캄보디아에서 5년간 기자 생활을 했었다는데, 특히 그 곳에서 만난 북한 사람들에 대한 얘기가 인상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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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스라엘에서 했던 각종 생각들.

하나. 셰룻 sherut
먼저, 이스라엘은 금토가 휴일이고 일월화수목이 주중이다. 금요일 해가 지고 나서 부터 토요일 해가 지고 난 얼마 후까지가 안식일 Shabbat 인데 중요한점은 이 동안은 버스, 기차와 같은 모든 대중교통도 멈춘다는 점이다.

그러나 물론 최후의 수단이 남아 있는데, 바로 셰룻 sherut 이라고 불리는 (주로 10인승) 소형 버스다. 대도시 내부나 혹은 주요 도시 사이를 매일 24시간 운행하는데, 정류장에서 손님을 기다리다 10명이 꽉 차면 출발하는 방식이다. 덕분에 대중교통이 끊긴 늦은 밤이나 안식일때에는 아주 유용하게 사용하게 된다.

꽤나 괜찮은 시스템 같아보여서 뭔가 수입하고 싶었다. ^^ 다른덴 몰라도 버스와 지하철이 끊긴 새벽에 강남역 출발 - 각 수도권 도시 도착으로 운행하면 수요도 충분하고 경제성 있지 않을까. ㅎㅎ


둘. 유대인 학생 캠프
각종 관광 도중에 중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단체 관광객을 많이 만났다. 알고봤더니, 미국/유럽의 유대인 학생들이 캠프에 참가한 것이었다. 수많은 재단과 복지가들이 있어 무료로(!) 학생들의 이스라엘 캠프를 지원하고, 알고봤더니 같이 여름 인턴을 하는 친구들 중에도 그런 기회를 통해 한두번씩은 적어도 이스라엘의 명소들을 다 둘러봤더라. 감탄이 나올 뿐이었다. 이런게 진정 자국의 문화와 역사를 아끼고 지켜나가는 것인데, 미래엔 미국의 한인 학생들에게도 이렇게 한국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까.


셋. 종교 - 국가/민족주의
10주가 넘게 머무르고 지켜보면서, 유대교가 종교라기보다는 국가주의 혹은 민족주의에 더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는 종교와 애국심이 너무나 구분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내 이런 얘기에 한 친구는 - 그래도 국가는 치안과 같은 서비스를 국민에게 제공하고 그 덕에 애국심을 갖게 되는 것 아니냐 - 는 얘기를 했는데, 이상적으로야 맞는 말이긴 하지만 솔직히 국가가 내게 어떤 직접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리고 그런 현실적 설명만으로는 괜시리 가슴속부터 올라오는 민족애 따위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것 같다. 이른바 '나와 좀 더 가까운' 사람들을 아끼는 감정이 민족주의라면, 생각해보면 그 가까움이라는 것의 기준도 정말 애매하고 비논리적일 뿐이다. 서양인들의 민족주의가 약한건 그 대신 그들에게 기독교가 있어서였기 때문이고, 상대적으로 종교의식이 약한 우리 아시아인들은 그래서 민족의식이 강한 걸까. 다분히 민족주의가 강한 편에 속하는 나로써는 이런 일련의 생각끝에, 원래 가지고 있던 종교인들에 대한 내 약간의 거부감을 돌이켜 보게 되었다.


넷. 여행
지난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의 겨울에 이어 이번 여름을 통해 다시금 생각한건, 혼자거나 동성 친구와 여행을 다닐때면 자잘한 돌 몇개 남은 유적이나 미술관을 찾을게 아니라, 거대한 자연이나 놀라운 고대유적 따위를 쫓아다녀야 한다는 점이다. 그 편이 여행이 훨씬 즐겁고 또 많이 남는다. 로맨틱함은 여자친구와 만끽하고, 친구랑은 뻘뻘 땀흘리며 하이킹한 끝에 눈앞에 펼쳐지는 웅장한 대자연, 놀라운 고대문명을 만나도록. 그런점에서 다음 여행으로는 차타고 오스트레일리아를 한바퀴 돈다거나, 중남미의 마야, 잉카 유적지를 답사하고 싶어졌다. 그랜드 캐니언이야 그래도 미국 안인데 언젠가는 가겠지 ㅎㅎ


다섯. 이미 주어진 것들에 대한 감사함.
예루살렘 밑에서부터 홍해에 접한 휴양도시 에일랏을 지나 요르단 국경을 넘고 페트라에 가기까지, 대략 대여섯시간 동안 창 밖에는 작렬하는 태양과 뜨거운 바람, 그리고 끝없는 사막 뿐이었다. 이 황폐한 땅에서 수천년간 인간이 살아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경외감이 느껴졌다. 덧붙여 이런 환경이니까 그렇게 수많은 성인과 종교가 발생했겠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들이 본 모든 것들이 환상이라고 말하고 싶은건 아니지만, 상상해보라 - 그 사막을 몇시간씩 땀을 흘리며 걷다보면, 바위에서 아른아른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조차도 영적으로 느껴지지 않을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아마 초등학교때부터 우리나라는 자원이 없는 땅이라서 열심히 공부해야 된다는 얘기에 익숙할 것이다. 기름나는 저 아랍 국가들은 얼마나 축복받았는가에 대해 많이들 한탄들 많이 한다. 어휴, 그나마 기름이라도 나면 다행이긴 한데, 난 차라리 기름 안나도 사계절 뚜렷하고 어딜가나 푸른색을 만날 수 있는 땅에 살련다. 그 황폐한 환경에서라면 내 마음도 따라서 황폐해질것만 같다. (그런데도 과할만큼 친절한 아랍인들이 놀라울 뿐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만난 아이들을 보면 내게 주어진 것들에 대해 감사할 수 밖에 없다. 온 몸에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제대로 식수를 공급받지도 못하면서 페트라 유적 내에서 먹고 자고 살아가는 아이들을 보면, 아둥바둥 작은 것들에 속상해하고 서로를 상처주고 싸우고 했던 모습들이 미안해진다. 그 속에서도 그 아이들은 너무나도 밝고 친절하기만 한데.





정리.
이제 마무리 하고 한국이다. 솔직히 말하면 각종 미국 경험에 지난 겨울 이번 여름까지 아무리 여행이 좋다지만 너무 잦은 덕에 조금씩 질려가는 느낌도 없지 않았는데, 2년 후면 다시금 고파지겠지..? ㅎㅎ

아, 그래도 이 여름의 주는 연구활동이었는데, 놀러다닌 얘기만 한 것 같아 연구실 사진도 올려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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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7. 17. 03:49
이스라엘에서 둘러본 곳들 - 1


06/18-19 텔아비브 Tel Aviv
4000년 역사의 항구라던 Jaffa에서는 진짜 오래된 건물이 아니라 오래된 것처럼 보이는 새 건물만 있길래 조금 실망했다. 텔아비브의 집들은 모두 하얀 색이었는데, 더운 나라라면 당연한 하얀 집들을 보고 - 그리스 같다.. - 고 생각하는 날 발견했다. 역시나 첫인상은 참 중요하다.

지중해로 떨어지는 석양을 봤다. 간간히 파도자락에 흰 달빛이 비추기도 했지만, 밤 바다는 정말 불빛 하나 없이 어두웠다. 이제 육지 내에서는 어느 곳이듯 아무런 빛이 보이지 않는 경우를 찾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텐데, 그런 생각때문이었을까, 괜시리 마음이 시원하게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치만 그런 반가운 마음 한 켠으론, 무척 무서웠다. 원양어업선 위의 선원들은 매일 밤 아무 불빛없는 사방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06/29 마사다 Masada, 사해 Dead Sea, Ein Prat - 여름 인턴 단체 여행.
1세기경 유대인들이 로마인들에게 마지막으로 저항했던 장소 중 하나. 끝까지 저항하다가 패배가 확실해지자 모두들 자결하는 길을 택했다고 한다. 그 얘기에 당연스레 일본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로, 끝까지 저항하던 그 사람들의 명칭에서 질럿Zealot이란 말이 유래했다.) 동편엔 사해가 보였고 서편엔 험준한 바위사막이 있었다. 유적보다도 주변 경관이 압도적이었고, 여기가 이런데 그랜드 캐니언 가면 정말 기절하겠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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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다 꼭대기에서 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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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해에서. 유명한 사진처럼 책읽는 포즈를 잡고 싶었는데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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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n Prat에서의 하이킹을 마치고 규섭이와 한 장.



07/03 아코 Akko
혼자 찾아갔던 도시. 기원전 19세기 이집트 문헌에서부터 등장한다는 아코는 가장 다사다난 했던 도시 중 하나다. 헤라클레스가 부상 회복을 위해 쉬어갔다는 전설도 있고, 알렉산더 대왕도 지나갔었다고 한다. 십자군 시절에는 유럽 각지에서 오는 십자군들과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 전에 모이던 항구였고, 살라딘에게 잠시 빼앗기기도 했던 도시다. 이후 오스만 제국의 밑에 있다가 근대에 이르게 됬다.

아코를 갔다 온 며칠 후 네이버 오늘의 세계 인물의 주인공으로 사자왕 리처드가 등장한 것을 봤다. 리처드가 살라딘과 이 아코에서 했던 전투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 등장했다. 묘한 인연/타이밍이 참 재밌었다.

좁은 길들을 이곳 저곳 뒤지고 다니면서 십자군들이 지었던 건물의 흔적과 모스크 등을 둘러보았다. 대체 종교가 뭐길래 이 거대한 것들을 짓고 부수고 다시 짓고 다시 부수고 또 짓고 또 부수고 했을까.




07/14 예루살렘 - 여름 인턴 단체 관광.
예루살렘 근교에는 Yad Vashem이라는 홀로코스트 기념관이 있다. 반유대주의의 기원에 대한 간략한 설명으로부터 시작해서, 히틀러의 등장부터 2차대전의 끝까지는 그들의 만행과 유대인들의 안타까운 역사에 대한 아주 상세한 설명/인터뷰/자료 들이 이어졌다. 2차대전만 아니었어도 독일이 지금의 미국 역할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안타까운 생각이 다시 한 번 들었고, 그 비인간적인 학살의 방식을 보며 인간은 참 어이없게 신기한 존재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의 역사도 역사이니만큼 어느정도는 감정이입을 하고 관람을 할 수 있었는데, 이렇게 잘 마련된 기념관이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갖는 의미를 생각하다 보니 우리나라의 독립기념관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러곤 참 문제라고 생각했다. 정작 이 먼 곳에 홀로코스트 기념관에는 와봐도 우리나라 독립기념관은 가 본적이 있는지 조차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참 부끄러운 일이다... 덧붙여 예루살렘 관광에서 여름 인턴들을 이곳으로 데려왔다는 사실이 참 정치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다비드 시 city of David에선 Hezekiah의 터널이란 곳이 있었다. 3000년 전의 사람들이 400미터 가량의 터널을 뚫어 예루살렘으로 물을 공급하는 터널을 만들었는데, 그 터널을 관광객들이 따라 걸어갈 수 있었다. 단순히 끌과 망치로만 그 터널을 만들었을텐데, 역시 고대인들은 위대하다는 생각을 했다... (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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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vien, Nathanel과 함께 통곡의 벽 앞에서. 유대교 성지에선 여성들은 어깨를 가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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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시대 유적 중 한곳에서 여름 인턴 단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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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 시에서 올리브 산 Mt. Olive을 배경으로.

연구소에서 마련해준 단체 여행인 만큼 유대인과 관련된 부분들만 둘러보게 되었다. 기독교와 이슬람 관련 장소들은 개인적으로 다시 찾아가 볼 계획. 예루살렘까지 가서 예수님 무덤이랑 십자가를 안보고 돌아올 순 없잖아?ㅎㅎ
2009. 6. 20. 08:11
그렇습니다.
9월 14일 논산에서 입대합니다.
절대 붙을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그 어학병 시험에 붙어버렸네요 ㅎㅎ

군대를 가는 길에 시험/합격이라는 과정이 속해 있어서인지
결국 군대에 오라는 통지인건데 그걸 보고 좋아라 하고 있는게 뭔가 웃기기도 합니다만..

아무튼 이제 진짜 가는군요.
2009. 3. 16. 19:07

운이 좋게 기회가 닿아 이번학기부터는 기숙사가 아니라 Telluride House라는 곳에 살고 있다. 세계 최초의 상업용 교류전기 발전기를 만들었다는 L. L. Nunn이라는 전기공학자가 1911년 우리학교에 만든 집이다. Self-governing (자치), Intellectually Stimulating Atmosphere (활발한 지적교류) 이 두가지가 이 집이 추구하는 목표다.

그리고 그 공학자는 Telluride Association이라는 비영리 자선 단체를 만들었는데, 그 단체에서 기획하고 추진하는 일 중 하나가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여름방학 캠프다. Telluride Association Summer Program, 이른바 TASP라고 불리는 이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고등학생들은 방학동안 대학에 거주하면서 대학교수들이 준비한 일련의 특별 강의를 듣고 토론을 나누는 등의 활동을 하게 된다. 짧게 말하자면 고등학생에게 내가 사는 이 집에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맛 볼 수 있게 해주는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끼린 프로그램 지원서를 TASP + Application을 줄여서 TASPlications라고 부른다. 

미국 전역 뿐만 아니라 터키, 유럽, 남아공 등지에서도 지원서가 오는데, 지원자들 중에 먼저 인터뷰 대상자를 결정한 후 그들을 해서 최종 프로그램 참가자를 뽑는다. 그런데, 그 인터뷰 대상자를 정하는 심사위원들이 바로 이 집에 현재 살고 있는 대학생들이다. 나보다 영어 더 잘하는 학생들의 에세이를 읽고 평가하는 일을 내가 해야만 하는 상황인것이다. 4주간 일주일에 스무명씩, 한 학생당 5개의 에세이를 읽었다. 시간을 많이 뺏길까 걱정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괜찮았고, 특히 고등학생들의 에세이가 재미있기도 하고 내가 배울 점도 많아서 에세이 읽는 것을 꽤나 즐길 수 있었다.

대다수의 학생들이 모두 자기 학교에서 1,2등 하는 학생들이기에 사실 성적표는 거의 쳐다보지도 않았다. 혹은 성적이 그렇게 좋지 않다해도 거의 신경쓰지 않았다. 중요한건 학점 하나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기에, 나 스스로가 비록 학생으로써 그런 담대함을 가질 정도는 못되지만, 채점자로써는 그 사소한 '학점'에 학생을 평가하고 싶지 않았다. 학생들은 많은 에세이를 써야 했고, 덕분에 그 속에 충분히 잘 나타나는 학생의 모습을 기준으로 했다. 고등학생이 겪은 경험과 생각의 폭이란게 물론 한정되 있겠지만, 전형적인 공부잘하는 학생의 에세이들은 가차없이 잘라버렸다. 그리고 정말 반짝반짝거리는 특별한 경험들을 가진 학생은 다른 모든것이 수준이하더라도 뽑자고 했다. 내 개인적이 가치관이 심사에 아주 큰 영향을 끼쳤겠지만, 당당하지 못할거야 없었다. 억울하면 어쩔꺼야 내가 심사위원인데 ㅋㅋㅋ

그리고 그들의 에세이를 읽으면서 나의 대학 입시 에세이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나는 왜 그런 에세이 밖에 쓰지 못했을까. 나같은 애들은 너무나 흔해서, 그렇게 전형적인 그저그런 [똑똑한 학생 에세이]를 써서는 심사하는 사람에게 아무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다는 것을 느꼈다. 정말 반짝반짝거리는, 특별하고 예외적인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굳이 대단한 경험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하면 좋다.) 그치만 누구나 본인의 인생에서 극적인 순간은 있기 마련이고, 그걸 글로 잘 반짝거리게 풀어내면 충분하다. 하지만, 내 대학입시 에세이는 지금 생각해보면 절대 그렇지 못했다. 나는 전형적인 공부잘하는 학생에 불과해 보였을 것이다. 그것만으론 부족했었다. 당연히. 그런 애들은 전 세계에 널렸거든. 한편으론 그런 에세이에 관한 교육은 전혀 받을 수 없는 한국이 아쉽기도 했다. 그런 글을 잘쓰는 게 진정 자기PR을 잘 하는 건데.


읽으면서 느낀 점 중 하나는,
고등학생의 장래희망 설계가 한국의 현실과 전 세계의 현실이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는 점이다. 괜찮은 집안에서 좋게 곱게 자란 아이들은 인문학 같은 것들 하겠다고 하는 한편, 개발도상국에서 미국으로 유학오고 싶어하는 학생들, 미국 내에서 소수인종에 속하거나 경제적으로 불우한 가정환경에 속한 아이들은 모두다 하나같이 의사가 되고 싶어 했다. 마치 약속이나 한 것 처럼. 그리고 의사가 되고 싶은 고등학생들이 장래희망 에세이에 무슨 말을 적겠는가? 백명이면 백명 모두 박애주의 의사가 되어 보람찬 삶을 살고 싶다고 했는데, 그게 바로 내가 가장 싫어하는 장래희망 유형이다. 덕분에 그런 녀석들은 모두 나의 부정적인 선입견에 불이익좀 받았을 거다. ㅎㅎ 차라리 - 나 돈벌려고 의사할꺼야 - 라고 말했다면 더 잘봐줬을지도 모르겠다. 패기 넘치는 장래를 꿈꿔도 모자랄 판에 벌써부터 타협하는 고만고만한 인생을 목표로 하는 모습을 보긴 싫었다. 적당히 우수한 학생들을 뽑는 거라면 이해할 만한 부분이었겠지만, 모두가 뛰어난 학생들 중에서 더 눈에 띄는 애들을 추려내야 하는 작업이었기에 나는 냉정했다. 저런 장래희망은 전혀 [반짝거리지] 않는다.

놀라웠던 점 중 하나는 한국 본토에서 지원한 학생이 있었다는 것이다. 미국에 유학중인 한국 학생들이 지원한 거야 당연하다고 생각됬지만, 한국 본토에서 지원한 사람이 있을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물론, 그 학생은 민사고 학생이었다. 유학이란 목적에 있어서 민사고가 국내 고등학교 중 가장 좋은 점은 교수진도 학생들의 실력도 아니라, 바로 그 정보력이 아닐까. 이번에 그 정보력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혹시나 사심이 들어갈까 싶어 내가 그 학생을 평가하지는 않았다.


다음은 너무나 반짝거리거나 너무나 보기싫어서 인상깊었던 지원자들.

1)
아르바이트로 식당에서 일하는 어떤 애는 같이 일하는 이란 불법 이민자와 함께 설거지를 할때마다 영어 단어를 소리치며 가르쳤다고 한다. 그동안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에 대해 불만을 갖고 아쉬워했다는 사실이 그 이민자와 이야기를 나눈 후 너무 부끄러워졌다고 했다. 그리고 그 친구가 들은 인생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칭찬은, 그 이란 노동자가 그 친구에게 했던 말이라고 했다. - 넌 내가 만난 백인 남자애중 가장 열심히 일하는 애야. 찡했다. 이 학생은 장래 희망에 관해 적는 에세이에 이 에피소드를 적으며, 아직까지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그 이란 노동자와 대화하면서 느낀 그 마음으로, 그 칭찬을 들었을 때의 그 마음으로 계속 살아갈 거라고 했다. 다른 에세이들은 보통 혹은 양호 정도일 뿐이었지만 바로 YES 했다.

2)
다섯 개의 에세이 주제 중에, 살아오면서 겪은 갈등에 대해 쓰라는 것이 있다. 부모님이 모두 의사인 터키의 어느 학생은, 자신의 가정 환경 덕에 본인이 정말 쉬운 삶을 살았을 것 같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고 말하며 그 에세이를 시작했다. 덕분에 나는 흥미진진해하며 에세이를 읽어나갔지만, 학생이 그 도입부 이후에 소개한 자신의 인생의 가장 큰 갈등이라는 것이, 터키 고등학교 입학시험(터키는 고등학교 입학시험이 있어서 그 성적순으로 고등학교를 간다고 한다)에서 아주 우수한 성적을 얻어서 터키 최고의 기숙사 학교에 갈 수 있게 되었는데, 그 기숙사 학교를 가느냐 혹은 집에 가까운 학교를 가서 계속 가족과 같이 함께 사느냐에 관한 고민이었다고 했다. 정말 말 그대로 기가 찼다. 지금 그걸 내 인생 최대의 고민이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 내 인생은 쉬웠고 난 어려운 일 겪은 적이 없어요 - 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글도 잘쓰고 성적도 뛰어났지만, 이 학생은 고민없이 바로 NO를 줬다.

3)
뉴저지의 어떤 한국계 미국인 여학생은, 모델 혹은 영화배우가 꿈이라고 했다. 학교에서 연기와 관련된 수업을 들어보고는 그 매력에 푹 빠졌단다. 집안의 당연한 반대가 이어졌고, 고민하다가 자신의 능력을 가족들에게 먼저 보여주고자 해서, 혼자 유명 오디션에 몰래 참가해 합격했고, 그 이후 부모님께 그 사실을 알려 활동 승낙을 받았다고 한다. 몇 개의 아동용 프로그램에 출연했고, 마이크로소프트의 광고에 출연했으며, 작년에는 헬렌헌트가 주연인 영화에 출연했다고 했다. 독특한 경험과 진취적 마음 가짐이 마음에 들었지만, 다른 에세이들이 보통일 수준 뿐이어서 Weak Yes를 줬다.

4)
오레곤의 어떤 남학생은 친할아버지 할머니 모두 삼십대에 심장병으로 돌아가셨고, 외할아버지는 세차례 암을 겪다 돌아가셨으며, 작은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부모님은 이혼하셨고, 911 이후 어머니는 실직하셔 한동안 집세까지 밀리는 가난도 경험했고, 누나는 똑똑하지만 대학생때 강간당한 잊지 못할 아픔을 갖고 있고, 여동생은 항상 조울증에 시달리며 입에 담을 수 없는 폭언들을 자신에게 쏟아낸다고 했다. 그런 와중에 어머니께서는 암까지 걸리셨고, 학생은 그 암수술을 겪는 시기에 자신이 학업에 시달리느라 소홀했던 가족에게 미안했던 마음을 그 갈등 에세이에 적었다. 18세의 고등학생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은 그 인생의 무게를, 너무나도 긍정적인 마음으로 담담히 받아내고 있는 이 친구의 에세이를 읽으면서 나는 결국 울고 말았다. 그 학생은 911 이후의 가난경험을 떠올리며 벌써부터 가난에 시달리는 곳들을 찾아다니며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고, 그런 다사다난한 가정환경 속에서도 최고의 학업성적을 올리고 있었다. 이 친구에겐 당연히 YES를 줬다.


이 반짝 거렸던 친구들이, 훗날 어떻게 자랄까. 궁금하다.

2009. 1. 21. 06:41
겨울방학동안의 이탈리아, 스페인 여행을 마치고 새 학기가 개학했다. 여행덕분에 정신적으로야 잘 쉬었다 온 셈이더라도 육체적으로는 새학기 시작이 꽤나 피곤할 줄 알았는데, 딱히 뭐 그럴것도 없다. 잊을 수 없는 한 학기를 보내고 새학기를 맞이하는 과정이 또다시 되풀이되고, 좋은 다짐들 - 매번 꼭 실천할 것이라고 다짐하는 - 과 함께 새 학기를 시작하고 있다.

다음은 간략한 여행과정과 약간의 생각들.

12/20 출국

12/21 로마, 밀라노행 야간기차
가는 길에 암스테르담을 경유했는데, 암스테르담 들어갈때 여권 검사를 하더니 로마에 들어설때는 마치 국내선을 빠져나오듯 아무런 검사 없이 그냥 통과했다. EU회원국 끼리는 이미 여권 검사를 안하는 모양이었다. 정말 많이 통합됬구나.

12/22-23 밀라노
미리 예약하지 않은 덕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보지 못한게 좀 아쉽긴 했지만, [뭐 나랑 인연이 아닌가보지 뭐] 하고 넘겨버렸다. 개인적으로 밀라노 두오모가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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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4-25 베네치아
크리스마스를 베네치아에서 보냈지만 별로 특별한 건 없었다. 크리스마스가 되는 0시에 성당에 가 봤으면 좋았을텐데 0시가 되어서야 그 생각을 했다. 오래된 풍의 거기서 거기인 듯한 건물들만 잔뜩 있어서 꽤나 질리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야경은 좋았다. 멋있는척 하고 사진좀 찍어봤는데 그건 쫌 아니었다.ㅋㅋ 첫날은 계속 안개가 자욱했지만, 둘째날은 날이 무척 맑았고, 덕분에 한 도시의 두가지 면을 보는 것 같아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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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6 피렌체
이쁜 도시였다. 냉정과 열정사이 덕분에 한국인과 일본인들은 이탈리아에서 꼭 들러야 하는 도시가 되고 말았는데, 그래서인지 괜히 좀 거북했다. 난 여기 두오모보다 밀라노 두오모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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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7 피사, 루카
나폴리로 내려가기 전, 작은 두 도시를 들렸다. 탑이 잘못지어져서 얼떨결에 기울어지면 관광지가 된다는 사실이 꽤나 웃겼다. 루카에서는 대도시보다 소도시를 여유롭게 둘러보는게 좋은 여행일거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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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8 나폴리
오는 길에 너무 고생했다. 끊었던 기차표엔 좌석 번호가 없었고 덕분에 간이석에서 밤새도록 졸고 내려갔다. 도착 후 일단 한인민박에 연락해서 1박은 아니고 낮에 좀 자고 가겠다고 우기고서는 잠부터 잤다. 도시는 4시간 남짓 둘러봤는데, 피자는 맛있었고, 도시는 정말 지저분했으며, 덕분에 도시를 제대로 둘러보지 못한 것에 대한 별 아쉬움 없이 또 야간 열차에 몸을 실었다.

12/29-31 시칠리아 섬 - 타오르미나, 카타니아, 아그리젠토, 시라큐사
타오르미나에서 뜨는 해를 보겠다는 야심은 비오는 날씨로 인해 망쳤고, 카타니아 가서도 비는 계속 내려서 그냥 첫날 하루는 쉬었다. 차를 렌트해서 돌아다니려고 알아봤지만 다 수동기어일뿐 오토가 없어서 포기하고 기차로 이동하자고 마음먹은 30일 아침, 얼떨결에 렌트카 업체를 하나 더 발견했고 오토인 차가 있어서 렌트했다. 이틀간 500키로를 달리면서 아그리젠토의 그리스 유적과 시라큐사의 그리스 유적을 돌아다녔다.
시칠리아의 초원은 눈부셨다. 가다가 양치기 청년과 양떼를 만나 차를 잠시 멈췄다. 그리스 신전을 성당으로 바꾼 시라큐사의 성당은 독특했다. 돌아가는 길에 다시 들린 타오르미나에서는 멋있는 절벽 아래의 바다를 볼 뻔 했지만 다시 비가 왔고, 여행중 가장 아쉬웠던 순간이었다. 새해는 로마로 돌아가는 야간기차에서 맞이했다. 새해의 첫 한시간은 기차가 배에 실려 메시나 해협을 건너가는 동안 배의 갑판위에서 바다를 보면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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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사진찍는 것에 대해 의욕이 없었고, 혹시나 하는 맘에 카메라는 들고 갔지만 충전기는 챙기지 않았었는데, 이때쯤에 밧데리가 다되서 더 이상 사진을 찍지 못했다. 카메라가 아니라 눈에 좋은 것들을 담고자 갔었던 여행이었기에 별로 아쉽지 않았다. 저 양떼 사진은 못찍었으면 아쉬웠을텐데 그래도 저건 찍었으니까 ㅎㅎ 그 이후엔 반드시 찍고 싶은 장면도 없었다.

1/1-4 로마
첫날 로마는 하루종일 비가 왔다. 이럴줄 알았으면 타오르미나에서 새해 일출이나 볼걸, 하고 무척 아쉬웠다. 여행 내내 느껴왔던 것이긴 했지만, 주요 관광지마다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맥도날드의 힘이 정말 놀라웠다. 

1/5-7 바르셀로나
가장 마음에 들었던 도시. 가우디의 건축물도 건축물이지만, 도시 전체가 조형물, 설치물, 디자인으로 가득차 있었다. 평범한 아파트들도 독특한 디자인을 자랑했다. 사실 바르셀로나뿐 아니라 스페인, 포르투갈 전체가 그랬다.

1/8 세비야
여행중 가장 맑은 날이었다. 햇살 밝은 날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성당벽에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들이 어른거렸다. 가로수로 오렌지 나무를 사용하길래 꽤나 신기했고, 보기에도 이뻤다. (물론 먹을 순 없다더라)

1/9 코르도바
우연히 들어갔던 뷔페집이 중국뷔페길래 반가워하면서 마구 먹고 있는데 흘러나오는 중국 노래 사이에 장나라의 한국어 노래가 흘러나왔다. 반갑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했다. 중국내에서 정말 장나라는 대단하구나.

1/10 그라나다
알함브라 궁전은 거대했지만 날씨가 너무 추웠다. 세비야, 코르도바, 그라나다로 이어지는 안달루시아 지방의 각종 이슬람 유적은, 백인 관광객들에게는 가장 이국적이고 매력적인 장소인것 같았다. 이슬람의 미술은 패턴의 반복에 '집착'하다시피 한다.

1/11-13 마드리드
지쳐가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고 몸도 좀 안좋기도 했고 마드리드엔 볼것이 없다길래, 마음 깨끗하게 비우고 편하게 쉬면서 마드리드의 3대 미술관만 제대로 보자고 결심했다. 자고 먹고 미술관다니고 그랬다.

1/13-15 리스본
흑인이 무척 많았다. 대항해시대의 흔적일런지. 물가가 무척 쌌다. 유럽대륙의 서쪽 끝이라는 호까곶에도 갔었는데, 해안의 절벽과 그 사이사이의 마을들이 꽤나 멋잇었다.

1/15 출국.


그리고 전반적인 여행동안 했던 생각들.

1. 론리플래닛 영어판에는 정말 주옥같은 표현이 넘쳐났다. 읽으면서 몇번을 폭소를 터뜨렸고, 방학동안 영어공부 덕분에 정말 많이 했다. 한국어 번역으로는 그 감칠맛이 살아남지 못할텐데, 아쉬웠다.

2. 인상적이려면, 기억에 남으려면, 적당히 다른 것들보다 뛰어난 것이 아니라 압도적이어야 한다.

3. 결국은 어떻게 프레임하느냐가 중요하다. 좋은 전시장을 꾸며서 잘 전시하고 이름표를 갖다 붙이면 관광객이 찾아오는 것이다. 사실 그 안에 결정적인 역사적인 작품은 많아야 서너개일 뿐이었다.

4. 우리는 왜 목조건물만 지었을까. 석조건물들이라면 오늘날까지 남아서 훌륭한 문화유산이 되었을텐데.

5. 예전부터 한국인과 중국인, 혹은 일본인이 만나 한글도 중어도 일어도 아닌 영어로 서로 대화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아이러니하고 안타깝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그런데 그라나다의 버스 안에서, 더듬더듬 억지로 영어를 이어가는 스페인인과 그와 대화하는 미국인을 보았다. 미국인이 스페인 땅에서 스페인어를 모르는 것은 당연한거고, 스페인땅에서 스페인인이 미국인과 대화하려면 어설픈 영어라도 써야한다는 사실이 갑자기 너무 어이없었다. 힘의 논리상 당연한 건걸까. 너무 오만한 것은 아닐런지. 여행하는 미국인 혹은 영국인은 이런 현실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까. 아무 생각이 없을까, 부끄러울까, 아니면 당연하게 여길까.

6. 백인이 다수인 땅에서는 소수이지만, 그래도 아시아인은 본인들이 인종적으로 다수가 되는 고국이 존재한다. 인도인, 무슬림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흑인은 어떨까. 아프리카가 그들에게 그런 의미일까? 돌아갈 고향이 없다는 기분은 어떤 기분일까.


챙겨간 것
입은옷 + 양말 2켤레, 팬티 2장, 반팔티 2개, 읽을 책, 여행책, 장갑, 카메라, 잠옷 츄리닝 바지, 수건, 여권, 수첩, 볼펜, 휴지, 여행용 세면도구 세트

안챙겼어도 괜찮았을 것
여분의 양말 팬티 반팔티 모두 하나씩이었어도 여행은 가능했을거 같다 (먼산)
겨울철이라 장갑을 챙겼지만 쓸 일이 없었다.

챙겨가면 좋지만 굳이 챙길필요는 없는 것
손톱깎기 - 어떻게든 구할 수는 있다.
우산 - 매번 들고다니자니 무거운데 막상 비오면 아쉽다.
읽을 책 - 읽을 일이 거의 없긴 한데, 아무 할일 없는 날에 요긴하게 쓰인다.

챙겨갔어야 했던 것
무언가 있었는데 지금 당장 기억이 나질 않는다. ㅡ.ㅡ;;




유럽에서 보낸 25박 26일동안 1600유로 가량을 썼다. 하루 평균 64유로. 교통비까지 포함된 계산 결과임을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숫자다. 학교에서 출발해서 돌아오기까지 달러로 계산하면 약 3200달러 정도를 사용했다. 옛 환율이면 꽤나 잘 절약한 돈일텐데, 요즘 환율론 450만원 가량이나 된다. 쩝.

여행중 봤던 것들, 만났던 이들 모두가 직접적인 가르침을 내게 주진 않았다해도, 무의식 속에서 나에게 새로운 인상과 느낌을 전해주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번 여행이 날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앞으로 차츰 드러나겠지. 기대된다.

여행하면서 지금은 자주 만나지 못하는 나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엽서를 보냈다. 만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안타깝고, 자주 보고싶고, 계속 친하게 지고 싶은 사람들. 엽서를 받았다면 나의 그 소중한 몇명안에 든거라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ㅎㅎ



마지막으로, 여행중 들렸던 미술관에 대한 품평은 천천히 차례대로 올려보도록 하겠다.
2008. 9. 28.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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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YS 3316 Basics of Quantum Mechanics 양자역학 입문
PHYS 3360 Electric Circuit 전자회로
MATH 3130 Honors Introduction to Analysis 1 해석학
MATH 4330 Honors Linear Algebra 선형대수학
AEP 321 Mathematical Physics 수리물리학
GERST 2000 German 독일어
Research 연구참여 무릎관절의 물리적 특성

이번 학기 시간표다. 학점으로는 22학점 정도 된다. 연구참여하는 것을 몇 학점으로 할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

한 4주 살아봤는데, 사실 좀 아슬아슬하다. 지난 주엔 하루는 4시에, 이틀은 5시에, 다른 이틀은 6시에 잤다.  매주 있는 해석학, 선형대수학 숙제가 개당 6-10시간 정도 걸리고, 전자회로 보고서가 대략 8시간 정도 걸린다. 일주일에 한 5-60장 정도의 종이를 쓰는 거 같다. 그냥 해야할 일을 하는데에만 일주일이 꼬박 쓰이는데, 이제 이번주부터 시험까지 치게되면 어떻게 될지 조금 겁나긴 한다. 하지만 늘 그랬듯이, 닥치면 결국 해내겠지.

전자회로 실험은 늘 정해진 시간보다 더 늘어지기 때문에, 월수금이든 화목이든 보통은 하루 일과를 다 마치고 저녁 먹고 나면 7-8시가 된다. 방으로 돌아와 조금 인터넷을 하다가 자리 잡고 할 일을 시작하는건 보통 8시 정도. 눈앞에 닥쳐서 해야되서 하는 일들이긴 하지만, 정신없이 거의 쉬지 않고 4시까지 숙제하고 공부할 수 있는 걸 보면, 확실히 수학과 물리가 내게 맞다는 생각이 든다. 작년에 독일어 숙제와 글짓기 숙제 같은 경우 3시간 정도 하면 질려버렸었거든. 다행히 이번학기 부터는 독일어 수업의 할일이 대폭 줄어서 즐기면서 할 만 하다.


중학교 마칠 때 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원하면 뭐든지 다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가끔은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일이 생기기도 하는 구나.- 라는 것을 배우게 됬다. 그게 내 능력의 문제든, 학업의 문제든, 여자문제든, 혹은 일반적인 인간관계의 문제이든.

하지만 좀 더 생각해보면, 내가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게 아니라, 그 방법이 있지만 내가 실천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니, 전부 다다. 어찌됬는 헤쳐나갈 방법은 늘 있고, 중요한건 내가 주변상황과 우선순위를 냉철하게 판단하고, 판단 후엔 뒤돌아보지 않고 행동하는 거다.

뭘 모르는 소리라고, 아직 인생의 쓴맛을 못 본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을 것 같다. 하지만, 사람이 살면서 본인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과 일과 운이라는게 있는거지 - 라고 인정하는 그 순간 나는 그저 그런 보통 인간이 되는거다. 나란 그릇은 이미 완전히 빚어진 그릇이 아니라 내가 계속 빚는 그릇이니까, 내가 크게 만들려고 하면 커지고 작게 만들려고 하면 작아진다. 그 사람은 대단해서 해내고 나는 보통이라서 못 해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해내면 대단해지는거고 난 안된다고 미리 포기해버리면 평범해지는거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도 못해냈다면, 담엔 되겠지, 하고 씌익 웃고 훌훌 털고 일어나면 되는거다. 언젠가는, 반드시 된다. 저번에도 말했듯이, 결국은 내가 나를 얼마나 믿느냐의 문제다. 끝까지 안된다 해도, 결과를 위해 참은게 아니라 과정 자체를 즐긴거니까 아쉽지 않을거다.



그 수많은 20대 초반의 로망들 중에서, 매일밤 밤새서 공부하는게 제일 로망스러운거 같다. 미래에 보상받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지금 현재 그게 제일 즐겁다. 이 소중한 내 청춘을 쏟을 만한 값어치가 있는게 공부 외에도 많은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공부 뿐인거 같다.  그저 그런 것들에 시간을 쓰기에는 지금 내 인생이 너무 바쁘고, 좋다.


그러니까, 종민아. 조금만 더 독해지자.
2008. 7. 10. 13:59
가수 김장훈이 독도와 동해에 관한 광고를 뉴욕타임즈에 기재했다고 한다. 요즘 학교가 아닌지라 신문을 거의 접하지 못하고 있어서 실제 광고를 보지는 못했다.

미국에 와서 세계 지도를 3-4번 정도 볼 일이 있었는데, 그냥 재미삼아 찾아본 동해는 모두 Sea of Japan 이었다. 지금 일하는 페르미랩의 가속기부(Accelerator Division)의 제어실 옆에는 벽 한 켠을 꽉 채우는 크기로 세계 각국에 위치한 주요 가속기의 위치를 표시해 놓은 지도가 있다. 그 사진도 Sea of Japan 이었다. 한국에서 그렇게 난리법썩을 떨고 문제제기를 해도, 세계 속에서 동해는 결국 일본해일 뿐이구나 - 라고 생각했다. 우리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한 경제력과 정치력을 바탕으로 쌓아논 수십년을 그렇게 금방 바꿀 수는 없는 거겠지만, 그래도 자꾸만 발견하게 되는 일본보다 작은 한국은 마음 한구석을 씁쓸하게 했다.

그렇다. 그저 씁쓸했다. 딱히 화가 나거나 울분이 치밀어오르거나, 일본이 지독하게 밉거나 그런 것도 아니었다. 이게 현실이구나 - 라고 생각했다. 난 이 현실을 그저 받아들인 것이다. 인정한 것이다. 옆에 있는 친구에게, 이거 틀린 거라고, 사실 역사적으로 동해라고 불려왔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 그저 푸념하고 있는 것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김장훈은 뉴욕타임즈에 광고를 실었다.

머리를 꼭 한대 맞은 것만 같다.
2008. 6. 8. 17:41

인턴을 시작한지 일주일이 되었다. 내가 배정된 프로젝트는 레이저에 관한 것인데, 덕분에 아직까지는 각종 레이저 관련 안전교육이나 눈 검사 등을 치루느라 별다른 특별한 것을 하지 못했다. 다음주부터는 본격적으로 뭔가 배우고, 실험하고 하게 될 것 같다.

5/19 - 5/31 - 이타카에서
심타 졸업여행을 다녀오고 인턴시작하기까지 생긴 2주간의 시간은 대부분 범준이형과 뒹굴뒹굴 빈둥빈둥하며 보냈다. 매일 10시간씩 꼬박꼬박 자고, 10시간 못채우면 낮잠으로 채우고, 같이 맥주마시고 얘기하고 밥먹고 운동하며 보낸 열흘 가량이었다. 그리고 졸업식까지 학교에 남아 있었던 덕분에, 졸업을 앞둔 많은 심타 선배들과 즐겁고 좋은 얘기들을 나눌 수 있었고 그들을 좀 더 많이 알게 된 것 같다. 특히 범준이형이랑은 너무 친해져버렸다. ㅋㅋㅋ 뭐 좋은게 좋으거지 뭐 ㅋㅋㅋㅋ 범준이형은 참 좋다. 형에대해 겉만 아는 사람들은 쉽게 평가할지 모르겠지만, 정말 열심히 살고 근성있는 형이다. 그리고 난 열심히 살고 근성있는 그런 사람을 좋아한다.

5/31 토요일 -  인턴하는 시카고로 가는길
시카고로 오는길, 필라델피아를 경유하도록 예약되 있었는데 이타카에서 출발하는 비행기가 연착되서 필라델피아에서 타기로 된 비행기를 놓치지나 않을까 많이 걱정했었다. 혹시나 했던 연착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필라델피아발 시카고행 비행기가 이륙하기 20분 전에 게이트에 도착해서는 몇몇 사람들이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국내선이라 아직도 입장을 시작하지 않았나보다-라고 생각하며 멍하니 앉아있다가 가만히 눈앞에서 비행기를 놓쳐버렸다. ㅡ.ㅡ;; 다음 비행기 티켓으로 바꾸고 (다행이 추가 비용은 없었다), 점심을 먹고, 기다리다가, 비가 내리던 날씨로 인해 그 비행기도 1시간 늦춰져 예상했던 것보다 시카고엔 3시간 가량 늦게 도착해버렸다. 그냥 웃겼다. 나 참, 천하의 윤종민이 이런 멍청한 일을 다 겪는 구나. 좋은 경험이었지 뭐.
페르미랩에서 예약해준 리무진 서비스는 너무나도 좋은 차를 몰고 왔고(거의 에쿠스 급이었다) 도착한 아파트도 생각보다 너무 좋았다. 좋은 매트리스에 시트와 이불이 깔려져 있는 바람에 가져온 이불과 배개가 무색해졌고, 각종 식기도구가 모두다 갖추어져 있는 것에 매우 안도했다.

6/2 월요일 - 인턴 첫날
첫날은 그저 각종 서류 처리와 끝없는 안전교육으로 잔뜩 지쳐버렸다. 그런 일정 끝에 멘토와 만나는 시간이 있었는데, 나의 멘토가 중국인 유학생이길레 솔직히 많이 실망해버렸다. 전체 인턴중에 유일한 아시아인인 나에게 전체 멘토중에 유일한 아시아인이 배정되었다는 사실은 우연치고는 참 웃겼고, 멘토의 이름을 미리 알았으므로 그가 중국인이라는 사실에는 놀라지 않았지만, 중국계 미국인이 아니라 대학까지 중국에서 마쳤을 것이 분명한 중국식 액센트와 어색한 발음 어색한 영어를 구사하는 토종 중국인이라는 사실은 좀 꽤나 많이 실망하게 만들었다. 나 스스로도 아직 영어가 미숙한 아시아인인 주제에 영어에 능수능란하고 유머러스한 백인을 바라고 있는 내 자신도 참 웃기지만, 뭐 내가 인종[구별]적인걸 어떡하겠는가. 사실 게다가 이왕이면 좋은 학부를 나오고 좋은 대학원을 나온 사람이어서 인맥적으로 나중에 도움이 됬으면 하는 매우 기회주의적인 기대까지 하고 있었던 나다. 딱 까놓고 얘기해서 그러한 조건을 만족하는 멘토이어야 내가 얻을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것이 더 많을 테니까 그런 내가 별로 부끄럽진 않다. 그치만 딴것보다도, 영어만 모국어처럼 구사하는 중국인이었다면 별 실망 안했겠지만 그게 제일 아쉬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러한 나의 바램과 불평불만은 어디까지나 주가 아닌 덤일 뿐이니까, 좋게좋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6/6 금요일 - 그룹 미팅
내가 속한 그룹의 미팅이 매주 금요일 오후마다 있다. 서로 토론하는 물리 내용을 잘 몰라서 그저 멍하니 앉아있었다. 하지만 이런게 회의라는 것이구나, 이런걸 직장에서는 하는구나, 이런 연구소에서 하는 형태는 일반적인 경우와 좀 다르겠지만 어쨌든 요런 종류의 것이 회의라는 것이구나 라는 것을 느꼈다. 덧붙여 같은 실험실을 공유하는 물리학자들이 서로 약간씩 다른 연구 주제에 대해 서로 토론하고 의견을 주고 받는 모습이, 꽤나 멋있어 보였다. 여러명의 어른이 서로 물리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그 전엔 본 적이 없었거든.



영어
벌써 유학 1년차가 되었지만, 항상 영어만 사용할 수 있는 환경에 대한 묘한 부채감이 있었고, 덕분에 이번 인턴 기간동안 만큼은 영어만 써야 한다는 사실이 참 반가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너무 답답하지는 않을까. 애들이랑 잘 어울리지 못하는 건 아닐까. 그런데 일주일 살아보니, -아, 이제 내가 정말 미국에 어느정도 적응하긴 했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처음 미국와서 느꼈던 그런 불안함과 답답함도 없고, 그냥 애들이랑도 잘 지내고 잘 놀고 떠들고 같이 밥해먹고 출근하고 있다. 한 아파트에 4명이서 같이 살고 있는데, 둘은 괜찮은 애들이긴 한데 하나는 정말 제대로된 [영재] 혹은 [geek, nerd] 혹은 [재수없는 잘난척 하는 녀석]이다. 그런데 그게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걔를 제외한 나머지 세명이서 계속 걔 뒤땅까면서 놀고 있기 때문에 ㅋㅋㅋㅋ 영어로 소통하는 것이 이제 그닥 답답하지는 않은 수준에 이르렀고, 나랑 대화하는 친구들도 그닥 답답하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아직 내가 서사를 풀어내지는 못한다는 것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친구들이 하는 얘기를 이해하고 맞장구치고 한번씩 대화하고 하는 것은 이제 잘 되지만, 자 들어봐-하며 내가 이야기를 풀어놓기에는 많이 답답했다. 그리고 나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아니라 이야기를 주도하는 사람이다. 다시한번 영어공부에 대한 열의가 불타오른다. 그들과 기회가 있을때는 절대 빼놓지 않고 열심히 대화하고 놀고 어울려야지. 그리고 따로 영어공부를 하자. 아예 스크립트를 통째로 외우는 거다. 결국은 멍청하고 묵직한 방법이 승리한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미국까지 왔는데, 공부라는 토끼만 잡으면 아무래도 섭섭할 것 같다. 영어는 원어민이 되겠다. 반드시.

하지만, 아무리 영어에 많은 노력을 붓는다 해도 절대 영어와 한국어를 섞지는 않겠다. 평상시 말할때 그 둘을 섞어 쓰는 것은 이미 매우 싫어했지만, 내가 한국말로 한국말 할 줄 아는 한국인한테 말 걸었는데 상대방이 영어로 대답할때의 그 이질감과 어의없음과 당황스러움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당연히, 다른 미국 사람들과 함께 대화할때는 한국사람과도 영어로 대화해야 겠지만, 1:1 대화에서 한국인끼리 영어를 사용한다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미국에는 정말 이상한 방향으로 미국화된 한국인이 너무 많다. 딱히 다른 이유가 있는게 아니라 영어가 너무 익숙해져서 그러는 것일 뿐이라고? 근데 난 그게 싫다는 거다. 나는 절대 섞지는 않겠다. 영어로 말할때는 영어만, 한글을 말할때는 한글만.



미국식 생활
그리고 미국애들은 정말 한국애들과 다르다. 어찌나 개인주의적인지.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어색하다는 얘기다. 한날은 같이 사는 넷이서 함께 마트에 가서 장을 봤는데, 각자 장을 보고 각자 계산해서 각자 요리하고 각자 설거지하고 지낸다. 한번씩 요리도 해주고 설거지도 같이하고 하지만, 주로 [각자] 식이라는 거다. 각자가 각자의 것을 산 덕분에, 지금 냉장고엔 1갤런 짜리 우유가 무려 4통이나 있다. 남 신경 안쓰고 살기엔 매우 편하긴 하겠지만, 역시 이건 아무래도 한국인이 할만한 짓이 아니다. 한국인은 한국식으로 살아야지. 그나마 하기 쉬운 베이컨&에그 샌드위치 정도는 여러개 만들어서 같이 먹자고 했다. 한국 음식을 해 줄 수 없다는 게 조금은 아쉬웠는데, 오늘은 반갑게도 마트에서 신라면과 짜파게티를 발견해서 잔뜩 사가지고 왔다. 내가 해먹을때 같이 해서 나눠먹고 그래야지. 그들의 개인주의의 선은 내가 침범하면 안되겠지만, 그들이 그렇게나 개인적일수록 내가 비개인적으로 행동한다면 더 큰 울림으로 그들에게 다가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른바 [한국식]인거다. 미국에서는 철저한 미국인으로 살아가고 싶지만, 바람직한 한국적임은 잃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나의 한국적임이 어떤 부분에서는 인간관계의 무기가 될 수도 있다. -  아무튼 요즘 절대 해본적 없는 요리를 이것저것 시도해보고 있다. ㅋㅋ 말그대로 정말 [다양한] 경험중이다.



인턴쉽
내가 배정된 프로젝트는 레이저를 사용하는 곳이었는데 - 페르미랩에서 인턴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하는 일은 입자물리나 가속기와는 전혀 무관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입자물리에 아직까진 전혀 관심이 없는 나로써는 이게 좋은 일인 것 같으면서도, 조금은 아쉽기도 하다. 이번 일주일은 각종 레이저 안전교육과 눈 검사 등으로 시간을 보내서 아직은 잘 모르지만, 맛배기로나마 접한 나의 프로젝트를 통해서 다시한번 내가 미리 공부해놓고 익혀놓은 것들은 어떻게든지 나중에 쓰인다는 사실을 느꼈다.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나의 과거의 공부들이 지금의 프로젝트와 연관되어 있었다. 수학, 물리는 최고가 되고, 프로그래밍은 누구보다도 뒤지지 않을 정도의 수준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어떻게든 지금의 노력과 희생은 나의 미래에 도움이 될 것이다. 내 중학교 시절이 지금까지 나를 지탱하고 도와주고 있는 것처럼. (이제 좀 바닥나고 있는 것 같지만...ㅠㅠ)

멘토의 어색한 영어는 그렇게 아쉽지만은 않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주어지 현실은 인정하되, 최대한 앵기고 노력하고 잘보이고 뽑아낼대로 뽑아내자. 결국은 이것이 정답인걸.

10주간의 인턴 경험은 물리라는 학문적으로나, 영어적으로나, 또 일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배우는 것에 대해 많은 경험이 될 것 같다. 벌써 근무중에 적당히 인터넷이나 하고 facebook, 싸이, 블로그, 미디어 다음 기사등을 떠돌며 근무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어떤건지를 느끼고 터득해버렸다. ㅡ.ㅡ;; 앞으로의 10주가 꽤나 기대된다. 무엇을 더 겪고 느끼게 될까.



믿음
길고 긴 방황끝에 이제 정말 정신 좀 차린 거 같다. 다시 달릴 수 있을 것 같다. 지난 4년간의 그 끝없었던 곁눈질의 과정은 다시 내가 앞만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한국에서 쇠고기에 촛불에 시끄러운건 알지만, 이곳에서 내가 그것에 지나친 관심을 갖고 신경쓰는건 적극적 참여가 아닌 곁눈질일 뿐이고, 양심에 대한 어줍잖은 자위행위일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이곳에 왔고, 이곳에 온 이상 나의 현실에 집중하고 이 현실을 최대한으로 활용하고 뽑아내서, 나는 그저 나중에 갚으면 되는 것이다. 부채의식을 잃어서는 안되겠지만, 내가 처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것도 바보같은 짓이다. 내가 할일이 있고, 다른 사람들이 할 일이 있다.

내가 해 낼 수 있을까, 하는 의심과 불안함에 꿈을 낮추고 안정적인것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생각은 이제 사라졌다. 결국은 그 어느것도 쉽지 않고 그 어느것도 안정적이지 않고, 그 어느 것의 미래도 불안하다. 그 수많은 진로와 미래에 대한 문제는 끝에 이르면 하나의 질문에 도달하더라. - 나 스스로를 믿을 수 있는가, 나는 정말 뭔가 해낼 수 있는 놈이라고 끝까지 믿을 수 있는가. 내가 뭔가 해낼 수 있는 가를 의심하는 것은 답이 없는 문제다. 그리고 그 답없는 문제에 의문을 갖는 단계는 졸업할때가 됬다. 결국은 내가 해낼 수 있다고 [믿는가]의 차이다. 답은 아무도 모른다. 게다가 내가 해낼 수 있다 해도, 언제 해낼 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저 믿는 것이다. 4년간의 불안함, 두려움, 허무함, 그리고 방황은 나에게 이 결론을 주었다. 어줍잖은 자기경영서나 주변의 충고조언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제는 가슴으로 느낀다. - 나는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믿자. 그러니까 겁내지 말고 달리자. - 무언가 나름 많이 이뤘던 중학교 시절과 지금의 나의 차이는 저 두가지 생각 뿐이다.

믿음이 흔들릴땐 지금 99도라고 믿자. 조금만 더 달리면 이제 끓을거라고. 99도에서 멈추긴 아깝지 않냐고.




6/7 토요일엔 인턴중의 일원인 Jennifer의 집이 위치하는 St. Charles의 Riverfest에 다들 함께 놀러갔다가, Jenn의 집에서 바베큐하고 떠들고 놀았다. 거기서 다들 같이 찍은 사진 한장. 그러고 보니 프로필 사진 외에는 처음으로 블로그에 내 사진을 올리는 것 같다.ㅎㅎ (클릭하면 크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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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5. 5. 15:23

그제 술자리에서. 아는 형과의 대화중 차, 여자친구, 술 에 대한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나왔다.

내가 말했다.
- 음.. 저도 뭐 차있고 여자친구 있으면 술 안마시겠죠 뭐..

형이 말했다.
- 얌마 그게 아니라 차있고 술 안마시면 여자친구가 생기는거야 이녀석아!

아.. 그런건가?
진짜 명언이었음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