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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해당되는 글 1건
2007. 7. 16. 04:38
내가 사는 아파트에는 매일 새벽 4-5시 경에 음식물 쓰레기 수거 차가 지나간다. 수거차량이 각 아파트 단지 앞에 있는 음식물 쓰레기 함에 멈추면, 3명 정도의 아저씨들이 차에서 내려 음식물 쓰레기를 수거하고 돌아가신다.

내가 중학생일때, 한메일넷에서 로그인 후 첫 화면을 이메일이 아니라 마이페이지 같은 것으로 띄워 주던 시절이 잠깐 있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이, 새벽에 늦게 로그인을 하면 - 새벽의 여유를 즐길 줄 아는 당신 - 이란 문구를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 말이 참 좋았다. 새벽의 여유. 늘 내가 원하는, 가지고 있는 척이라도 하고 싶었던 그 것, '여유'와 어울리는 시간대가 바로 새벽인 것일까.

다른 친구들은 대부분 그 페이지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중학생이라면 늦어도 2시 가량이면 자는게 정상 아니었을까...ㅎㅎ 혹은 그 이후의 시간까지 자지 않더라도, 십중팔구 그것은 부모님 몰래 게임한다고 밤을 샌 경우일 것이다.(나도 종종 그랬으므로...) 그렇지만, 중학생때의 나는 공부한다고(!) 새벽까지 자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방 불도 끈채 스탠드 불만 켜 놓고서 그때는 그렇게도 재미있게, 혹은 재미없어도 잘 참아가며, 열심히 공부했던것 같다. 새벽이 깊으면, 내 귀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사부작 대는 샤프 소리 뿐이었다. 그리고 주무시던 어머니께서 한번씩 터트리시던 재채기 소리 정도..?

그러던 어느 여름날, 창문을 활짝 열고 공부하고 있던 나는 처음으로 쓰레기 수거차의 소리를 들었다. '이 시간에 왠 트럭 소리지..?'하고 창 밖을 바라보니, 세 아저씨께서 음식물 쓰레기를 수거차로 옮기고 계셨다. 이 밤에 일을 하신다니.. 싶다가도, 하긴 낮에 그 음식물 쓰레기들을 흉하게 치워갈 수 는 없는 거니까. 싶기도 하고. 일하시는 아저씨들이 무척 감사하기도, 또 무척 안되 보이기도 했었다. 열대야가 심한 밤이나 아주 추운 겨울날이면, 시원한 물 혹은 따뜻한 커피 한잔 갖다 드리고 싶어지기도 했다. 물론, 다 생각으로만 그친 일들이었지만 말이다.

그 이후론, 쓰레기 수거차가 온 소리를 들으면 하던일을 멈추고 창밖으로 아저씨들이 일하시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곤 했다. 어떤날은 3시가 채 안된 시간에 오시다가도, 어떤 날은 5시가 넘어서야 오시기도 하셨는데, 한동안 나는 일부러 음식물 쓰레기 수거차가 오고 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잠을 청하기도 했다. '그 차가 올때까지 공부하다 자야지.'하는 마음이었지 싶다. 지금 생각하면, 어찌나 이렇게 기특했던지..ㅎㅎ

새벽에나 있을 법한 재밌는 사건들도 많이 보았다. 공부하다 조금 지치고 질리는 기분이 들면 잠깐 창밖을 바라보며 숨을 돌리곤 했었는데, 그런 나의 휴식을 재밌게 살찌워 준 요소들이 바로 술에 취해 주정하는 아저씨, 밤늦게 연인을 집 앞까지 데려주고 돌아가는 승용차 등, 여러가지 새벽의 단면들이었다. 특히나 기억에 남는건, 자주까지는 아니었지만 꽤 여러번 보게 된, 아줌마A의 머리채를 쥐어 뜯고 계시는 아줌마B와 그 B를 말리는 어떤 아저씨C, 이 세 남녀의 모습이다. 불륜의 현장을 들킨걸까. 유사한 종류의 장면으로 아줌마 앞에서 무릎꿇고 비는 어떤 아저씨의 모습, 혹은 어떤 젊은 누나(?!)의 모습도 자주 보았다. 이상했던 점은, 꼭 A의 역할을 하시는 분들이 좀 더 젋어보이시는 분들이었단 점이다..ㅎㅎ B역할을 맡으신 분들의 그 다양한 욕설과 폭넓은 음역을 감상하는 것도 무척 재미있었다.

고등학교를 들어가고는 혼자서 새벽의 정취를 느낄 기회가 무척 적어졌다. 아무래도 기숙사 생활이었으니까. 고등학교에서의 새벽, 그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건 1학년때의 크리스마스 이브였던것 같다. 아, 12시가 넘었으니까 크리스마스 당일이었지. 지금 돌이켜보면 공교롭게도 그 시각도 딱 4시 가량이었지 싶다. 2학기 기말고사를 앞두고 다들 정신없이 공부하고 있던 새벽이었다.
"에이 크리스마스인데 이게 뭐야, 공부나 하고 있고ㅠ"
"야, 공부안하면 뭐 우리가 딱히 거 있냐? 할거 없는데 여자친구 있는 것들 설치는거 보는게 더 서글프다 얌마"
이런 류의 궁상을 떨고 있던 4시 무렵, 갑자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새벽. 그 눈의 기억.
"야! 밖에 눈와! 봐봐!"
"지이이이잉~"
"아놔, 휴대폰 바로 반응온다. 눈온다고 저것들 문자질이네 아놔. 할튼 ㅉㅉ"
이미 쌍방향 화살표를 그리고 있던 친구녀석은 먼저 문자가 왔고, 혼자 열심히 빗나가기만 하는 화살을 쏘고 있던 다른 녀석은 문자를 보내고 있거나 전화를 걸고 있다. 나는? 그 땐 후자였었던듯..?ㅎ
"아 이 자식들.. 이거 뭐 연락할 사람 없으면 서러워서 살겠냐? 나도 아무나 잡고 문자나 보내봐...?"
하며 휴대폰 전화번호부를 뒤적거리는 녀석도 있었다.
내방에 모인 친구들의 이런 모습을 즐겁게 지켜보다 문득 다른 방들은 어떨까 하는 생각에, 남자 기숙사 이방 저방을 기웃거려봤는데, 하핫, 역시나, 다들 비슷한 분위기다. 하긴, 크리스마스고, 눈이오고, 게다가 새벽이기까지 하니까. 그때 내가 전화를 걸었던 친구로부터 전해들은 바로는, 여자 기숙사도 똑같은 분위기였던 것 같다. 괜히 아무한테도 연락 안오는 여자애가 소외감을 느낄 만한 정도..?ㅎ
"야, 장난없어~ ㄱ은 A한테서 전화오고, ㄴ은 B랑 지금 전화하고 있고... 야 근데 있잖아,, ㄷ한테 C가 전화걸었다?ㅋㅋ"
다음날 농담처럼 C한테 '그래, 어제 전화는 잘 했냐? 잘해봐라~' 라고 말하자, 녀석, 움찔하드라ㅎㅎ

그 외에도 새벽 4시에 얽힌 기억이 참 많다. 12시부터 밤새 전화해서 4시가 되어서야 끊은 적도 여러번 있고,, 비디오를 3개 빌려서 11시부터 연속으로 셋다 보고 4시가 넘어서 잠자리에 들었던 적도 여러번이다. 늦게자서 잠을 줄이는게 아니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겠다는 일념으로 점호직후 바로 자서는 4시에 알람을 맞춰놓고서, 정작 4시에 알람이 울리면 그냥 끄고 자버린 것이 수십번은 될 것 같다. 기숙사 방에서 고스톱치다 날밤새본적도 있고, 러시아에서 학교 담밑으로 기어나갔다가 돌아온 시각도 4시였던듯..?

대학생이 되고 난 뒤로는 새벽 4시를 맞이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버렸다. 그치만 누구나 예상하듯이, 고작 컴퓨터로 헛짓 하다가 시간이 흐른 경우 아니면, 술자리에서 맞이하는 4시였다. 역시나 시간이 흐를 수록 점차 사라지는 애틋함과 추억과 로망인 것이다. 오늘도 사실 헛짓하고 빈둥거리며 놀다가 시간이 이렇게나 늦은거거든..ㅎ 그치만, 지난 한학기는 아무래도 맘먹고 놀고 빈둥거린 시기니까. 앞으로의 내 대학생활 동안에는 새벽 4시에 대해 어떤 기억들이 만들어질까.


이제 4시 반인데, 오늘은 음식물 쓰레기 수거차 특유의 엔진소리가 들리지를 않는다. 아까 내렸던 비 때문에 오늘은 쉬시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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