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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바라보다가'에 해당되는 글 1건
2009. 6. 10. 01:51
5/18-6/7
이번 한국행에선 계속 집에 머무르며 한번만 2박3일로 외출했다. 지난번들에 비하면 훨씬 조용히 보낸셈이다. 어학병 시험을 앞두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기엔 눈치가 보여서 집에 있었는데 ㅎㅎ 그렇다고 집에서 제대로 공부한 것은 당연 아니었다.


하나. 공항
일본을 경유하여 한국으로 돌아오는 티켓이었는데, 신종 인플루엔자 검역으로 인해 일본에서 환승한 비행기의 이륙이 두시간 정도 지체되었고, 덕분에 집으로 가는 마지막 버스 시간을 넘기고서야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서울 어디 아는 집으로 가자니 짐도 너무 많고 그래서, 그냥 공항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 첫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시차 덕분에 크게 졸린 건 없었고, 덕분에 책 좀 읽다가, 햄버거 하나 먹고, 인터넷 좀 하다가, 티비 좀 보다가 하다보니 어느덧 해가 떴다. 기다리면서 지난 겨울 로마와 암스테르담 공항에서 하루씩 노숙한 기억이 떠올랐다. 한국에서 나름 어릴 적부터 이곳저곳을 다닌 덕인지, 가끔 영상매체를 통해서 기차역과 버스터미널을 접하면 묘한 그리움과 아련함에 휩싸이곤 했었다 - 역과 터미널이 '내 공간'인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이제까지의 각종 공항에서의 경험에 이번 밤샘이 더해지면서 이제 공항도 '내 공간' 안으로 들어오는구나.. 싶었다.


둘. 소소한 일상의 행복
거의 매일, 저녁 식사 후 어머니와 손을 꼭 붙잡은 채 아파트 뒤를 산책했다.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며 웃고, 토닥토닥 소소한 말다툼을 하고, 산책로 위의 수많은 아주머니들께 인사를 드렸다. 아파트 뒤의 논에는 이미 모내기가 끝나 있었는데, 그게 자꾸만 눈에 들어오더라 -  해가 덜 진 초저녁에 산책할때면 조금씩 삐뚤삐뚤하게 심어진 모를 보며 그 특유의 옅은 초록색이 참 이쁘다고 생각했고, 밤엔 논을 거울삼아 비치는 아파트의 불빛들, 한국 특유의 요란한 상가 간판들, 그리고 달빛이 반짝거리는 모습을 눈에 담으려고 애썼다. 개굴개굴 개구리 소리도 귀에 찐했다. 산책 중간중간 어머니와의 대화가 끊길때면, 내가 얼마나 많은 일상의 소소함을 놓치고 살아가는지를 생각했다. 행복이란게 별게 아닌데.

그렇게 놓치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이어져 한국에 있지 않음으로써 내가 잃어버린 것들도 하나둘 떠올랐다. 아마 한국에서 대학을 다녔다면, 한두개의 동아리 안에선 회장 정도쯤 하면서 온갖 엠티와 술자리를 주선했을테이고, 계절마다 찾아오는 각종 영화제에 자원봉사를 신청했을 것이다. 이십대 초반이 지나기 전에 맘에 맞는 친구들과 지리산 종주도 해보고 싶고, 자전거에 텐트하나 얹이고 동해안 일주도 해 보고 싶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 남는건 그렇게 쌓아 놓은 추억들 - 산장속에서의 하룻밤, 여름임에도 냉기가 쩍쩍 올라오는 텐트바닥, 그리고 그러는 동안 내 눈에 담긴 우리나라 - 일텐데, 이런 것들을 놓친 만큼 혹은 그 이상을 미국에서 얻어내고 있을까.

그렇지만 다시금 생각했다. 이제는 머리로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지 않는가. 밖에 있으면 환상이었던 그 모든 것들이 안으로 들어가서보면 어느덧 일상이 되어버린다는 걸. 그렇게 안밖이 뒤바뀌면 어느덧 이젠 안에서 밖을 그리워하고, 일상이었던 것들이 환상이 되어버린다. 이것도 그런 걸꺼다. 이제는 재현 불가능해진 과거의 경험들에 대해선 감사해하고, 내 마음에서 그만 놓아야할 것들에 대해선 너무 안타까워 하지 말아야 겠지. 아 물론, 아직도 가능한 것들은 어떻게든 누려내고 말꺼다 ㅎㅎ


셋. 어학병
미국에서 머무르다 바로 인턴하러 갈 수도 있었는데, 그래도 굳이 한국을 들린 주된 이유는 사실 어학병 시험때문이었다. 지난 6월 4일이 시험 날이었고, 시험 전까진 집에 머무르면서 공부하는 척을 했다. 시험에선 오전에 영한 한영 번역을 하고, 오후에 영한 한영 통역을 해야한다. 앞의 세개는 그런데로 괜찮았지만 마지막 한영 통역에서 거의 한마디도 못하고 나와버렸다. 영어로 못 옮기겠었던건 아니었는데, 문제는 단 일초전에 한국말로 들었던 그 내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겠는 거였다.... 덕분에 시험은 떨어질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이고 나의 군대행은 계획에서 벌써 한칸 어긋나 버리고 말았다.. 에고.


넷. 내 오랜 친구들
목요일 아침 9시였던 어학병 시험에 구미에서 곧바로 갈 차편이 없어 전날 천안의 작은누나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도착한 천안에서 누나들과 시간을 보내는 사이, 먼저 어학병으로 입대한 정모로부터 전화가 왔다. 삼십분 남짓 통화했는데, 녀석도, 나도, 어찌나 여전한지. 어학병 시험과 군대 생활, 그리고 여자에 관한 시덥잖은 얘기들로 삼십분을 꼬박 채우면서 몇번이나 낄낄 거리고 웃었는데 - 참 좋았다.

시험이 끝나고 서울에서 만난 친구와도 한참을 얘기를 나눴는데, 내가 얼마나 말이 많았는지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왠지 그 친구가 흉봤을 것만 같다. ㅎㅎ 그리고 그날 밤 내려간 대전에선 재형, 강섭, 수연이를 만나 각자의 요즘의 삶과 고등학교 때 있었던 이야기들로 밤을 꼬박 새버렸다. 나 덕에, 그리고 각자의 대학에서의 갈라진 삶 덕에 이젠 삶의 공통분모가 꽤나 많이 사라졌다지만, 그들도 나도 참 여전했다. 맘 푹 놓고 마신 덕인지 맥주 서너잔에 벌써 취기가 올라왔고 정신없이 서로 놀리고 갈구고 욕하고 웃었다. 그 편안함.


그리고 다시 출국해서 지금은 이스라엘에 있다. 어떻게 운이 잘 닿아 이번 방학에는 이스라엘의 와이즈만 연구소에서 인턴을 하게 됬다. 하는 일은 초전도체와 관련된 건데, 일도 일이지만 이스라엘에서만 겪을 수 있는 것들을 많이 겪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어학병 시험을 공부하는 척 하면서 봤던 각종 영화와 드라마들.

와니와 준하
티비에서 결혼한 김희선이 나오길래, 몇번 뒤지다가 못찾겠음을 반복한 끝에 여전히 보지 못한, 김희선이 가장 아름다웠다던 영화 와니와 준하를 찾아봤다. 영화는 그냥 썩 괜찮은 정도였다.

미녀는 괴로워
와니와 준하의 주진모를 보고 이 영화도 보지 않았음이 생각이 나서 찾아보았다. 극중 주진모의 대사가 참 맘에 들었다. - 열심히 하는 것보다 잘 하는 것이 중요하지.

시티홀
극 중 차승원이 맡은 역할에 끌렸다. 사시와 행시를 동시에 패스한 천재이고, 매우 현실적이고 야비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만, 숨겨진 아픔이 있는 그런 캐릭터? ㅎㅎ 이젠 좀 정형화된 뻔함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런걸 내가 좋아하는 건 어쩔 수 없는 거고 - 거기에 파리의 연인을 썼던 김은숙 작가의 작품이라는 점까지 더해져 결국 일부러 찾아보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재미있는데, 김은숙 작가라는 사실이 초반부의 재미를 보장하는 건 사실이지만 덕분에 후반부의 늘어짐이 걱정스럽기도 하다....

박수칠 때 떠나라
시 티홀을 보면서 차승원의 길이, 몸매, 수트빨에 반해버렸고, 그래서 그의 영화를 찾아보게 되었다. 괜찮은 영화였다는 입소문이 기억나서 박수칠 때 떠나라를 가장 먼저 찾아보았는데, 이 영화도 그냥 그럭저럭이었다. 내가 장진식 유머를 좋아하지 않는 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고, 틈틈히 그런 유머가 영화의 흐름을 끊었던 것만 아니었다면 꽤나 괜찮은 스릴러물 이었을 것 같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마찬가지로 찾아본 차승원의 영화.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럭저럭한 장르물이었다.

그저 바라보다가
우 연히 주말 재방송으로 9화와 10화를 보고는 재미있길래 앞 화도 다 찾아보았다. ㅡ.ㅡ;; 평범한 우체국 직원(황정민)과 우리나라 최고의 톱스타(김아중)가 어떤 계기로 위장결혼한 끝에 결국은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인데, 둘의 로맨스의 전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나도 별 수 없이 황정민이 나고 김아중이 김태희 혹은 송혜교라는 환상을 품으며 감정이입을 하게 되었다. (^^) 덕분에 드라마가 매우 재미있다. 그리고 미녀는 괴로워와 이 드라마를 통해서, '몸매만 좋지 얼굴은 별로잖아'였던 김아중에 대한 평가가 '몸매는 정말 최고고 얼굴도 저만하면 충분히 이쁘지!'로 바뀌었다.

너무 놀라지 마라
때마침 구미에서 개최된 전국연극제의 개막작으로, 어머니와 함께 관극했다. 극중에선 가난과 정신이상과 패륜에 의한 놀랄 일들이 계속해서 튀어나오는데, 주인공들은 연극의 제목처럼 그걸 전혀 놀라지 않고 받아들인다. 장영남의 넘치는 에너지가 돋보이는 연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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