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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2. 10. 12:18

토요일 점심때의 기숙사 식당은 특히 붐빈다. 수업이 없는 관계로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 식당으로 향하는 데다가 주말인지라 아침 늦게 일어나 첫 끼니로 먹는 사람들까지 겹치기 때문에, 12시 - 1시 사이에는 바글바글하다. 들어갈때마다 늘 중얼거려지는게 - 아 저기에 핵 하나 떨어뜨려서 깨끗하게 정리했음 좋겠다... 정도니까. ㅎㅎ

이렇게나 사람이 많을때에는 늘 먹던 오믈렛을 먹는 것이 조금 망설여 진다. 오믈렛은 조그만한 쪽지에다가 원하는 재료를 적어주면 그것을 바탕으로 직원이 만들어주는데, 주문이 많이 밀려 있을 경우 그 조그만 쪽지를 나눠주지 않고 밀린 주문이 어느정도 해결되야 다음 쪽지를 나눠주게 된다. 그래서 주말 점심때는 오믈렛 주문을 기다리는 줄이 워낙 길다. 줄서기가 싫어 식당을 한바뀌 쭉 둘러 봤는데, 오늘따라 유난히도 먹을게 없어서 한숨 푹 쉬며 결국 오믈렛 줄에 섰다. 먹을건 이거 밖에 없구나.

줄에 서 있는 사이 어떤 아주머니와 세 자녀가 보였다. 기숙사 거주 교수의 가족일런지, 그냥 어쩌다 오게된 관광객인지 모르겠지만, 이리저리 톡톡 튀는 세 아들, 딸 들을 조절한다고 이렇게 저렇게 고생하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그래도 식당 사정을 어느정도 아신 아주머니였는지, 갑자기 줄 맨 뒤에 있던 내게 다가와 [지금 오믈렛 종이를 기다리는 중인건가요?]라고 물었다. 웃으며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아들래미 하나가 먹고 싶어 했는지 내 뒤에 줄을 세운다. [줄 서있다가 네 차례 되면 주문하렴].

마침 기숙사 같은 층에 사는 친구 하나가 내 뒤에 줄을 섰다. 낯설어서인지, 제대로 줄에 서 있지 못하는 그 아들 녀석을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내 뒤에 끌어당겨 세웠다. [어, 얘 줄 선 거였어?] [응 ㅋㅋ] 어라, 근데 이녀석 뭔가 나를 꺼려하는 눈치다. 음, 아주 약간, 정말 아주 약간 정도, 내가 아시아인이라서 이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식당 직원이 몇장의 오믈렛 쪽지를 더 갖다줬다. 내 앞의 사람들이 죽죽 지나가고, 마침내 내 차례가 되었을때, 쪽지는 단 한장 남아 있었다. 이런. 꼬마에게 양보하고 내가 좀 더 기다려야 되는 건가. 꼬마의 엄마는 어딘가 보이지 않았다.

[자 꼬마야 이게 주문하는 종이거든? 여기다가 네가 오믈렛 속에 넣고 싶은 것들을 적어야 해요. 주문대가 너한텐 너무 높으니까, 내가 적어줄께ㅎㅎ, 재료 종류에는 양파, 햄, 베이컨, 피망, 치즈, 토마토, 정도가 있는데 뭐 먹고 싶니?]

라는 아주 아름다운 그림이 머리 속에 펼쳐졌다. 그러나 순간, 겁이 났다.

[이녀석, 날 조금 꺼려하던데. 음. 저 말들을 어떻게 꼬마한테 알아듣게 영어로 표현하지? 내 발음을 알아 듣기는 할까? 괜히 문제만 만드는거 아닌가, 아 그렇다고 한장 남은거 꼬마가 내 뒤에 서있는데 그냥 달랑 내가 쓰고 가기도 뭐하고. 뭐지. 아놔. 한국같았으면 이런 걱정 안하고 꼬마에게 아주 친절한 형이 되어줄텐데]

두 그림이 서로 좀 갈팡질팡하다가, 에라이, 그냥 내가 그 종이에 주문내용 적고 자리를 떠났다. 찝찝한 기분에 뒤를 돌아봤더니, 마침 꼬마 어머니가 달려와서 식당 직원과 이리저리 얘기하고 있더라. 다행이었다..


핑계 같겠지만, 한국같았으면 정말 저 아름다운 그림을 실현시켰을 텐데. 나 그런거 잘 하는거 모두들 잘 알잖아요ㅎㅎ [영어] 속에서는 나만의 매력과 장점을 자꾸만 잃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경우가 그런 경우다. 뭔가 씁쓸하고, 쩝, 하고 혀를 한번 차게 되는. 사실 한학기 좀 넘게 미국에 있으면서 좀더 많이 영어로 말하게 되었지만, 직접적으로 영어가 늘었다기 보다는 그저 틀리는거 이상하게 말하는거 겁내지 않고 뻔뻔해진게 주요한 발전이었다. 음, 그래도 아직 많이 겁나나 보다. 100%는 영원이 불가능하다손 인정하더라도, 한 95%정도까지만이라도 영어가 겁나지 않는 시기는 언제쯤 올까.